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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정약용]]이 저술한 [[백운첩(白雲帖)]]은 1812년 9월 12일 제자인 [[의선]]과 [[윤동]]과 함께 [[월출산]]에 놀러 갔던 [[정약용|다산]]이 [[백운동 별서정원]]의 12경을 노래한 시를 친필로 적은 시첩이다.<br/> | |
| + | 다산은 하산하던 중 [[백운동 별서정원]]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했는데, [[다산초당]]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곳의 풍광을 잊지 못해 서시를 포함해 도합 13수의 시를 지어 이 시첩을 꾸몄다. | ||
| + | 백운동 외경을 그린 백운도(白雲圖)는 [[의선]]이, 그 다음장에 백운동의 십이승경(十二勝景)마다 다산과 초의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_초의를 붙이고 그 말미에 윤동이 발문을 써서 붙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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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운동그림이 백운동정원을 복원하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 ||
백운동도와 다산도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초의선사가 젊은 시절에 다산의 명을 따라 그린 것이다. 이런 연유로 백운동 별서와 다산초당의 당시 모습이 오롯이 남게 되었다. | 백운동도와 다산도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초의선사가 젊은 시절에 다산의 명을 따라 그린 것이다. 이런 연유로 백운동 별서와 다산초당의 당시 모습이 오롯이 남게 되었다. | ||
백운동 12경의 명명이 이 시첩에서 최초로 이루어져 오늘날 백운동 별서 복원의 기준점을 마련해준다. | 백운동 12경의 명명이 이 시첩에서 최초로 이루어져 오늘날 백운동 별서 복원의 기준점을 마련해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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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첩은 표제에 예서로 '백운첩'이란 세 글자를 썼다. 표지를 넘기면 첫장에 백운동도가 펼쳐진다. | 백운첩은 표제에 예서로 '백운첩'이란 세 글자를 썼다. 표지를 넘기면 첫장에 백운동도가 펼쳐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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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초의선사가 「백운도」와 「다산도」를 그림 | ||
| + | 다산은 그 그림에 발문(跋文)을 달아 그 때의 사정을 설명했는데, 이 그림이나 시들은 문집에서 빠져 있어 전해지는 그림과 친필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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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다산의 시와 그림이 있는 20쪽 짜리 『백운첩(白雲帖)』은 이덕휘에게 다산이 답례로 준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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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를 9월 12일에 지었다고 했으며 발문은 9월 22일에 썼다. 이로 보아 다산이 백운동에 놀러 갔던 날이 1812년 9월 12일 이었고 그로부터 열흘 뒤 12승사 시를 더 짓고 초의의 그림 두 폭을 앞뒤에 얹어 작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첫 수를 9월 12일에 지었다고 했으며 발문은 9월 22일에 썼다. 이로 보아 다산이 백운동에 놀러 갔던 날이 1812년 9월 12일 이었고 그로부터 열흘 뒤 12승사 시를 더 짓고 초의의 그림 두 폭을 앞뒤에 얹어 작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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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첩에 수록된 시 13수는 다산시문집에는 모두 누락되고 없다. 결국 13수는 다산의 일시여서 자료 가치가 더 높다. | 백운첩에 수록된 시 13수는 다산시문집에는 모두 누락되고 없다. 결국 13수는 다산의 일시여서 자료 가치가 더 높다.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필사본 다산시고 에 이 13수가 온전히 실려있어 글자 판독이 가능하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필사본 다산시고 에 이 13수가 온전히 실려있어 글자 판독이 가능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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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만 쓰고 시는 다산이 지음 | 글씨만 쓰고 시는 다산이 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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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의 내용은 | 발문의 내용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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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 "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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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미련이 오래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을 시켜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 남은 미련이 오래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을 시켜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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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 「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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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격인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幽居)」 | 서시 격인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幽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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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 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 ||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뜻에 맞지 않는다네. |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뜻에 맞지 않는다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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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경은 운당천운(篔簹穿雲),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 제12경은 운당천운(篔簹穿雲),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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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 ==시각자료== | ||
2017년 4월 25일 (화) 00:22 판
정의
정약용이 저술한 백운첩(白雲帖)은 1812년 9월 12일 제자인 의선과 윤동과 함께 월출산에 놀러 갔던 다산이 백운동 별서정원의 12경을 노래한 시를 친필로 적은 시첩이다.
다산은 하산하던 중 백운동 별서정원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했는데, 다산초당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곳의 풍광을 잊지 못해 서시를 포함해 도합 13수의 시를 지어 이 시첩을 꾸몄다.
백운동 외경을 그린 백운도(白雲圖)는 의선이, 그 다음장에 백운동의 십이승경(十二勝景)마다 다산과 초의가 시(詩)을 번갈아 지었으며 맨끝장에는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도(茶山圖)_초의를 붙이고 그 말미에 윤동이 발문을 써서 붙였다.
내용
백운동그림이 백운동정원을 복원하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백운동도와 다산도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초의선사가 젊은 시절에 다산의 명을 따라 그린 것이다. 이런 연유로 백운동 별서와 다산초당의 당시 모습이 오롯이 남게 되었다. 백운동 12경의 명명이 이 시첩에서 최초로 이루어져 오늘날 백운동 별서 복원의 기준점을 마련해준다.
다산은 백운동을 직접 찾아가 그곳의 12경을 친필 시로 적어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와 다산도를 그리게 한 뒤 백운첩으로 꾸며 선물했다. 이 백운첩에 의해 비로소 백운동 12경이 명명되었다. 이밖에 다산이 백운동에 보낸 편지만도 현재 여덟 통이나 남아 있다.
백운첩은 표제에 예서로 '백운첩'이란 세 글자를 썼다. 표지를 넘기면 첫장에 백운동도가 펼쳐진다.
초의선사가 「백운도」와 「다산도」를 그림
다산은 그 그림에 발문(跋文)을 달아 그 때의 사정을 설명했는데, 이 그림이나 시들은 문집에서 빠져 있어 전해지는 그림과 친필을 보고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다산의 시와 그림이 있는 20쪽 짜리 『백운첩(白雲帖)』은 이덕휘에게 다산이 답례로 준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이 2001년에 세상에 알려졌다.
백운첩의 체제와 구성 1.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 : 백운동 이씨의 유거를 노래한 서시 2. 옥판봉 : 백운동 12경 3. 산다경 4. 백매오 5. 홍옥폭 : 초의선사가 진서체로 6. 유상곡수 7. 창하벽 8. 정유강 9. 모란체 10. 취미선방 11. 풍단 : 초의선사가 진서체로 12. 정선대 : 초의선사가 진서체로. 13. 운당원 : 윤동이 행서로 14. 다산 발문
다산이 쓴 백운첩의 발문에는 백운동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는데 그곳의 풍경에 대한 여운이 있어 함께 갔던 승려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긜게 했다. 여기에 자신이 지은 백운동 12경을 잇대어 적은 후, 끝에는 다산도를 그리게 해서 백운동과 다산초당 중 어느 곳이 더 아름다운지 겨뤄보고픈 마음을 내비쳤다. 시를 지어저 주었다고 했으니 이 시첩은 원래부터 백운동 주인에게 선물하기 위한 목적 당시 백운동의 주인이었던 이덕휘의 요청에 다산이 호응해서 써준 것으로 짐작
첫 수를 9월 12일에 지었다고 했으며 발문은 9월 22일에 썼다. 이로 보아 다산이 백운동에 놀러 갔던 날이 1812년 9월 12일 이었고 그로부터 열흘 뒤 12승사 시를 더 짓고 초의의 그림 두 폭을 앞뒤에 얹어 작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운첩에 수록된 시 13수는 다산시문집에는 모두 누락되고 없다. 결국 13수는 다산의 일시여서 자료 가치가 더 높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필사본 다산시고 에 이 13수가 온전히 실려있어 글자 판독이 가능하다. 글씨만 쓰고 시는 다산이 지음
이 12경은 백운동을 언급하면 빠질 수 없는 경관이 되었다.
발문의 내용은 "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을 시켜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서시 격인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幽居)」 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뜻에 맞지 않는다네.
십무(十畝)의 솔과 대로 땅의 이익 거두고 반산(半山)의 누각에서 물소리를 베개 삼지.
풍류는 예원진(倪元鎭)만 못함이 전혀 없고 명승은 고중영(顧仲瑛)에게 소문이 다 났따지.
상자 속에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어 훗날에도 금썩 같은 그 맹세를 안 바꾸네.
유정(幽貞)의 괘(卦)란 『주역』의 「이괘(履卦)」에 "이도(履道)가 탄탄하니 유인(幽人)이 곧고도 길하다"에서 따왔다. 유정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임금께 헌책(獻策)은 '헌책군문(獻策君門)'으로 임금 앞에 나아가 나를 위한 계책을 올린다는 의미로 벼슬길에 나아가 임금께 글을 올려 자신의 포부를 펼침을 말하는데 이담로는 그런 뜻이 없어 은사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백운동의 생활은 10무(畝)넓이의 송황(松篁), 즉 솔숲과 대숲에서 나는 소출로 이루어지고, 일상은 반산(半山) 누각에서 시냇물 소리를 베개 삼아 지내는 유유자적의 삶.
무는 전답의 단위로 1보가 사방 6자, 100보가 1무의 너비다.
반산은 고시 '누각연우반산중(楼閣烟雨半山中)'의 구절.
예원진(倪元鎭)은 원말과 명초의 문인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이다. 예원진은 그의 자로 그는 성품이 고결하여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가산을 정리하고 강소성(江蘇省)의 삼묘호(三泖湖) 호반에 소한관(蕭閒館)을 짓고 은거하여 풍류의 삶을 살았다. 다산은 예찬의 삶을 흠모하여 많은 시에서 언급했다.
고중영(顧仲瑛)은 원대 고덕휘(顧德輝, 1310~1369)이며 중영은 그의 자로 집안에 옛날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와 정이(鼎彛) 같은 골동품 모아 서경 서편에 별장을 짓고 '옥산가처(玉山佳處)'라고 불렸다.
끊임없이 손님을 초대해 사방의 학사들이 모두 그 집에 모여들었다. 풍류와 문아(文雅)로 명망이 높았다.
정이(鼎彛)은 고대의 제기로 거기에 새겨진 글이 한자의 원형에 가깝다고 한다.
다산이 꼽은 백운동12경
제1경은 옥판상기(玉版爽氣), 월출산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 제2경은 유차성음(油茶成陰), 산다경(山茶徑)의 동백나무 그늘. 제3경은 백매암향(百梅暗香), 백매오(百梅塢)의 매화향기. 제4경은 풍리홍폭(楓裏紅瀑),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어린 옥구슬 폭포. 제5경은 곡수유상(曲水流觴), 마당을 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 제6경은 창벽염주(蒼壁染朱), 창하벽에 붉은 먹으로 쓴 글씨. 제7경은 유강홍린(蕤岡紅麟), 정유강(貞蕤岡)의 용비늘 같은 소나무. 제8경은 화계모란(花階牡丹), 꽃 계단에 심은 모란. 제9경은 십홀선방(十笏禪房), 사랭채인 취미선방(翠微禪房)의 세칸 초가. 제10경은 홍라보장(紅羅步障), 풍단 단풍나무의 붉은 비단 장막. 제11경은 선대봉출(仙臺峰出),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停仙臺). 제12경은 운당천운(篔簹穿雲), 운당원에 우뚝 솟은 왕대나무.
시각자료
사진
의순의 영정[1]
영상
- [MBC] 다성 초의선사를 찾아서(게시일: 2016년 5월)
mbc프라임 불탄일 특집_다성 초의선사를 찾아서 from Youngin Koo on Vimeo.
관련항목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백운첩 | 백운동도 | A는 B를 포함한다 | |
| 백운첩 | 다산도 | A는 B를 포함한다 | |
| 정약용 | 백운첩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812년 9월 12일-22일 |
| 백운첩 | 백운동 별서정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여기서 제작됨.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내용 |
|---|---|
| 1812년 | 백운첩이 백운동 별서정원을 방문하였다 |
| 1812년 | 백운첩이 백운동도를 그렸다 |
| 1812년 | 백운첩이 다산도를 그렸다 |
| 1828년 | 백운첩이 다신전을 저술하였다 |
공간정보
| 위도 | 경도 | 내용 |
|---|---|---|
| 34.5877226 | 126.7460196 | 백련사는 백운첩의 수행지였다 |
| 34.7419353 | 126.6975985 | 백운동 별서정원은 백운첩의 방문지였다 |
참고문헌
- "의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의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다도",
『차생활문화대전』online , 네이버 지식백과.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초의선사",
『차생활문화대전』online , 네이버 지식백과.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