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유서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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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서식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서 유래하였다. 선전소식은 충렬왕대에 만든 왕명으로, 당시에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국정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는데,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선지(宣旨)를 반포하였을 경우에 의례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승선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작성하고 서명하는 선전소식이라는 간단한 왕명을 만들었다.
 
이같은 서식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서 유래하였다. 선전소식은 충렬왕대에 만든 왕명으로, 당시에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국정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는데,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선지(宣旨)를 반포하였을 경우에 의례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승선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작성하고 서명하는 선전소식이라는 간단한 왕명을 만들었다.
 
<ref>『고려사』권123, 「열전」권36, 폐행(嬖幸), 이분희, 이습, "이습이 응방 오숙부가 안찰사를 참소한 일을 논박하다."</ref>
 
<ref>『고려사』권123, 「열전」권36, 폐행(嬖幸), 이분희, 이습, "이습이 응방 오숙부가 안찰사를 참소한 일을 논박하다."</ref>
이것이 기원이 된 조선의 내전소식은 국왕의 명령 가운데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거나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잡사(雜事)일 경우에, 비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어보(御寶)나 담당 관청의 인신이 없이 승지 한 사람의 서명만으로 시행하였던 왕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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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기원이 된 조선의 내전소식은 국왕의 명령 가운데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거나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잡사(雜事)일 경우에, 비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어보(御寶)나 담당 관청의 인신이 없이 승지 한 사람의 서명만으로 시행하였던 왕명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문서 서식은 어보나 승정원의 인신이 찍히지 않았기에 위조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세종]]이 제기하였고<ref>『세종실록』권30, 세종 7년(1425) 11월 22일(정사), 2번째기사</ref> 논의가 진행되어 1443년(세종 25)에
  
 
==부연설명==
 
==부연설명==

2017년 4월 23일 (일) 02:05 판

틀:문화유산 유물정보

정의

유서(諭書)는 세종(1418~1450) 시기에 만든 왕명이며, 1592년에 학봉 김성일에게 내린 유서를 담은

내용

세종시기 이전 내전소식(內傳消息)이라는 왕명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을시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리는 간단한 왕명이었다.[1] 이같은 서식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서 유래하였다. 선전소식은 충렬왕대에 만든 왕명으로, 당시에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국정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는데,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선지(宣旨)를 반포하였을 경우에 의례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승선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작성하고 서명하는 선전소식이라는 간단한 왕명을 만들었다. [2] 이것이 기원이 된 조선의 내전소식은 국왕의 명령 가운데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거나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잡사(雜事)일 경우에, 비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어보(御寶)나 담당 관청의 인신이 없이 승지 한 사람의 서명만으로 시행하였던 왕명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문서 서식은 어보나 승정원의 인신이 찍히지 않았기에 위조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세종이 제기하였고[3] 논의가 진행되어 1443년(세종 25)에

부연설명

시각자료

관련항목

시각정보

공간정보

참고문헌

  1. 『태종실록』권32, 태종 16년(1416), 12월 2일(기미), 1번째 기사
  2. 『고려사』권123, 「열전」권36, 폐행(嬖幸), 이분희, 이습, "이습이 응방 오숙부가 안찰사를 참소한 일을 논박하다."
  3. 『세종실록』권30, 세종 7년(1425) 11월 22일(정사),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