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유서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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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시기 이전 내전소식(內傳消息)이라는 왕명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을시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리는 간단한 왕명이었다.<ref>『태종실록』권32, 태종 16년(1416), 12월 2일(기미), 1번째 기사</ref> | ||
+ | 이같은 서식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서 유래하였다. 선전소식은 충렬왕대에 만든 왕명으로, 당시에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국정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는데,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선지(宣旨)를 반포하였을 경우에 의례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승선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작성하고 서명하는 선전소식이라는 간단한 왕명을 만들었다. | ||
+ | <ref>『고려사』권123, 「열전」권36, 폐행(嬖幸), 이분희, 이습, "이습이 응방 오숙부가 안찰사를 참소한 일을 논박하다."</ref> | ||
+ | 이것이 기원이 된 조선의 내전소식은 국왕의 명령 가운데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거나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잡사(雜事)일 경우에, 비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어보(御寶)나 담당 관청의 인신이 없이 승지 한 사람의 서명만으로 시행하였던 왕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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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3일 (일) 01:46 판
정의
유서(諭書)는 세종(1418~1450) 시기에 만든 왕명이다.
내용
세종시기 이전 내전소식(內傳消息)이라는 왕명을 쓰고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을시 승정원(承政院)을 통해 내리는 간단한 왕명이었다.[1] 이같은 서식은 고려의 선전소식(宣傳消息)에서 유래하였다. 선전소식은 충렬왕대에 만든 왕명으로, 당시에 몽골과의 관계로 인해 국정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는데, 왕명을 받은 사신이 지방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선지(宣旨)를 반포하였을 경우에 의례 절차가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승선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작성하고 서명하는 선전소식이라는 간단한 왕명을 만들었다. [2] 이것이 기원이 된 조선의 내전소식은 국왕의 명령 가운데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공문을 보내는 것이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거나 사안이 중요하지 않은 잡사(雜事)일 경우에, 비교적 형식에 매이지 않고 어보(御寶)나 담당 관청의 인신이 없이 승지 한 사람의 서명만으로 시행하였던 왕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