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운-진주성싸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설명) |
|||
16번째 줄: | 16번째 줄: | ||
=='''설명'''== | =='''설명'''== | ||
===작품 소재=== | ===작품 소재=== | ||
− | + | 해당 작품은 1차 [[진주성싸움]]을 소재로 하였는데, | |
왜군하단의 중앙에는 일본의 전통 투구인 가부토를 쓴 귀신 모양을 한 왜장이 한손에 흰 빛의 일본도를 치켜 들고 있다. | 왜군하단의 중앙에는 일본의 전통 투구인 가부토를 쓴 귀신 모양을 한 왜장이 한손에 흰 빛의 일본도를 치켜 들고 있다. | ||
+ | |||
+ | |||
+ | 1592년(선조 25) 10월5일부터 10월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 ||
+ | |||
+ |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였으나, | ||
+ | |||
===작품 배경=== | ===작품 배경=== | ||
+ | 작품의 배경은 [[진주성]]으로, | ||
+ | |||
작품 상단 왼쪽 끝에는 푸른 색으로 칠해진 [[남강]]이 보이고, 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 작품 상단 왼쪽 끝에는 푸른 색으로 칠해진 [[남강]]이 보이고, 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 ||
===작품 구도=== | ===작품 구도=== | ||
+ | 일반적인 민족기록화는 주요 장수나 아군을 중앙에 배치하여 중심으로 삼고 아군의 시점에서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추격하는 구도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원근감을 이용하여 화폭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작품 하단에 적군을 배치하였다.<br/> | ||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경과 중경을 격퇴당하는 적군의 모습으로 가득 채우고 이를 검은 색의 거친 윤곽선과 전체적인 붉은 톤으로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의 긴장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널려있는 적군의 시체, 총포의 폭음과 인마(人馬)의 절규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상황은 잔혹한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반감(反感)이나 비애가 아닌 적의 파멸을 통한 아군의 승리를 역으로 강하게 전달한다.<ref>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93쪽.</ref> |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경과 중경을 격퇴당하는 적군의 모습으로 가득 채우고 이를 검은 색의 거친 윤곽선과 전체적인 붉은 톤으로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의 긴장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널려있는 적군의 시체, 총포의 폭음과 인마(人馬)의 절규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상황은 잔혹한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반감(反感)이나 비애가 아닌 적의 파멸을 통한 아군의 승리를 역으로 강하게 전달한다.<ref>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93쪽.</ref> | ||
− | |||
=='''시각적 안내'''== | =='''시각적 안내'''== |
2017년 4월 16일 (일) 16:34 판
진주성싸움 | |
작가 | 강대운 |
---|---|
제작연도 | 1975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미상 |
목차
설명
임진왜란중인 1592년 10월 1차 진주성싸움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의 지휘하에 3,800명의 관군과 2만여명의 백성들이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을 격파하여 곡창지대인 호남 진출을 막아낸 장면을 담았다.
설명
작품 소재
해당 작품은 1차 진주성싸움을 소재로 하였는데,
왜군하단의 중앙에는 일본의 전통 투구인 가부토를 쓴 귀신 모양을 한 왜장이 한손에 흰 빛의 일본도를 치켜 들고 있다.
1592년(선조 25) 10월5일부터 10월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였으나,
작품 배경
작품의 배경은 진주성으로,
작품 상단 왼쪽 끝에는 푸른 색으로 칠해진 남강이 보이고, 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 구도
일반적인 민족기록화는 주요 장수나 아군을 중앙에 배치하여 중심으로 삼고 아군의 시점에서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추격하는 구도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원근감을 이용하여 화폭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작품 하단에 적군을 배치하였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경과 중경을 격퇴당하는 적군의 모습으로 가득 채우고 이를 검은 색의 거친 윤곽선과 전체적인 붉은 톤으로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의 긴장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널려있는 적군의 시체, 총포의 폭음과 인마(人馬)의 절규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상황은 잔혹한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반감(反感)이나 비애가 아닌 적의 파멸을 통한 아군의 승리를 역으로 강하게 전달한다.[1]
시각적 안내
- 그림위에 마우스를 올려 보세요.
- 온라인 이미지맵 에디터
관련 민족기록화
1592년 4월 27일 박석호-추풍령싸움
1592년 5월 김태-홍의장군 곽재우
1592년 7월 오승우-행주대첩
1592년 7월 8일 김형구-한산대첩
1592년 8월 18일 정창섭-조헌선생의 금산전투
1592년 8월 28일-8월 31일 박항섭-연안성싸움
1597년 9월 16일 김기창-명량대첩
1593년 2월 6일-2월 9일박광진-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강대운 | 강대운-진주성싸움 | A는 B를 그렸다 | 1975년 |
강대운-진주성싸움 | 진주성싸움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강대운-진주성싸움 | 진주성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시간정보 | 내용 |
---|---|
1975년 | 강대운이 강대운-진주성싸움를 제작하였다. |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 육군 제1군 사령부가 강대운-진주성싸움를 대여하였다. |
1592년 8월 | 조헌이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 |
1592년 8월 | 영규대사가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3876635 | 127.9310766 | 강대운-진주성싸움이 육군 제1군 사령부에 대여되었다. |
그래프
참고문헌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92-93쪽.
- 대한민국국회의원동우회, 『민족기록화 전승편』,1981년, 104-108쪽.
주석
-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