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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4일 (금) 15:36 판
영월 흥녕사지 (寧越 興寧禪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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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월 흥녕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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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寧越 興寧禪址 |
이칭 | 흥녕선원지(興寧禪院址) |
주소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385 |
문화재 지정번호 | 강원기념물 제6호 |
문화재 지정일 | 1971년 12월 16일 |
관리자 | 법흥사 |
교구정보 | 대한불교조계종 |
건립시기 | 신라시대 |
창건자 | 자장 |
경내문화재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영월 징효국사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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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1]
내용
강원도 기념물 제6호.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자산파(獅子山派)의 본거지이다. 사자산파의 개산조(開山祖)는 철감선사(澈鑑禪師)도윤(道允)이라 말하고 있지만, 실제 사자산문을 개창한 이는 징효대사(澄曉大師)절중(折中, 826∼900)이다.
징효대사는 882년(헌강왕 8)에 이 절에 와서 891년의 병화(兵火)를 피해 떠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당시 헌강왕은 대사를 서울로 모시기 위하여 친서를 보냈고,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나라에서 돌보도록 하였다.
이후 천년 가까이 흥녕사는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다가,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감몽(感夢)을 받아 중건하여 절이름을 법흥사(法興寺)로 고쳤다. 1912년에 화재를 만나 1930년에 중건하였으나, 이듬해의 산사태로 절터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1933년에 이곳에서 1㎞ 정도 산쪽으로 올라와 다시 절을 지었으니 곧 지금의 법흥사다.
흥녕선원지는 법흥사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밭 앞쪽에 위치한다. 절터는 남향으로서 서쪽으로 계곡이 흐르고, 동쪽은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넓은 지대이다. 현재 종형(鐘形) 부도 하나와 사리탑의 대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나란히 놓여 있고, 주위에는 깨지거나 완형인 주춧돌들이 10여 개 묻혀 있다.
아울러 기와·토기·자기 조각들이 널려 있는데 약 1만평 규모로서 단국대학교에서 발굴한 바 있고, 금동불상이 출토되었다. 초석은 60㎝×75㎝ 크기에, 높이 40㎝이다.
선원지 앞길 옆 개울에는 거북모양 비석받침이 있는데 거북등에는 장육각형(長六角形)의 귀갑문(龜甲文)이 세 줄로 돋을새김되어 있고, 가운데에 넓게 판 비좌(碑座)가 있다. 거북의 앞면은 마모가 심하고, 머리도 떨어져나간 상태이다.
법흥사 주변에는 징효대사탑비(澄曉大師塔碑, 보물 제612호) 및 그 부도(강원도유형문화재 제72호)가 있고, 법흥사 뒤 산쪽으로는 방형연화대석(方形蓮花臺石)·석종형부도·석실(石室)·석관(石棺)·사리탑 등이 있다. -민백, 신종원
신라 오교구산(五敎九山) 중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중심사찰이다.
이 절은 원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으며, 사자산파의 중심사찰로 성장시킨 것은 개산조 도윤(道允)의 제자인 징효국사(澄曉國師)였다. 그 당시 헌강왕은 이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으나, 891년(진성여왕 4)에 병화로 회진되었다가 944년(혜종 1)에 중건되었다. -민백, 장충식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흥녕선원(흥녕사)은 신라 헌강왕 때인 882년경 징효대사 절중(折中)에 의해 창건된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도량으로 영월군 사자산(獅子山) 중턱에 있다. 891년(진성여왕 4) 소실되었다가 943년(혜종 1)에 중창하였으나 계속되는 전란과 화재를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902년 대원각(大圓覺) 스님에 의해 중건되면서 법흥사로 개칭되었으나 1912년에 소실된 것을 193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이때 홍수와 산사태로 법당 앞의 석탑과 옛 절터 일부가 유실되었다.
사자산문은 신라시대 말에서 고려시대 초까지 성행했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철감선사 도윤(道允:798~868)이 개창하여 그의 제자 절중에 의해 정립되었다. 구산선문이 번창할 때는 2천여 명에 이르는 수님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는데 공양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10리 밖에 있는 수주면 무릉도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법흥사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 민가 옆에 위치한 흥녕선원지는 법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74평) 1곳을 포함해 약 1만평 규모로 현재 집터에는 일부 훼손된 주춧돌 10여 개만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특히 이 일대에 흩어져 있던 징효대사의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2)와 부도탑비(보물 612),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3) 1기, 금동불상 1기, 부도에 사용되었던 석재 등의 유물들은 대부분 법흥사 경내로 옮겨졌고 금동불상은 단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흥녕선원의 길을 알려주기 위한 3개의 안내석탑과 1개의 수호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석탑은 제천시 장락에 있는 석탑, 무릉리 삼층석탑, 주천리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28)이고 수호불상은 징효대사가 입적한 곳인 요선정(강원문화재자료 41)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강원유형문화재 74)이다. -두산
흥녕사는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선종 9산문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징효대사에 의하여 크게 번창하였다. 그후 진성여왕 4년(891)에 전쟁으로 불에 타 없어져 고려 혜종 원년(943)에 다시 세웠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폐허가 되고 현재는 선원지만 남아있다. 1902년 원각스님이 새로 절을 지으면서 이름을 법흥사로 바꾸었는데, 1912년에 화재로 없어지고, 1930년에 옛 절터에 다시 세웠으나 다음 해의 홍수로 인해 법당의 석탑이 떨어져 나가고 절터 일부가 유실되었다. 현재 진입로 오른쪽에는 종모양의 부도 1기와 사리탑의 기단석으로 보이는 돌이 나란히 놓여있고, 주위에는 주춧돌 10여 개가 묻혀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흥녕선원지의 길을 가리키는 3개의 안내 석탑과 1개의 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석탑은 충북 제천시 장락에 있는 석탑과 무릉리의 삼층석탑, 주천리의 삼층석탑이고, 입구 옆에 있는 돌에 새긴 마애여래좌상은 흥녕사의 수호불이라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녕선원지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
이 비는 흥녕선원을 크게 발전시킨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혜종 원년(944)에 세운 탑비이다. 징효대사는 사자산문파의 개산조 도윤국사의 제자로서 당대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 비의 비문은 최언이 짓고 글씨는 최윤봉이 썼으며 최오가 새겼다. 흥녕선원에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탑비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동영상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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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년 |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
845년 | 무염이 오합사의 주지가 되어 크게 중창하였다. |
신라 문성왕 때 오합사에서 성주사로 개명되었다. | |
888년 | 무염이 성주사에서 입적하였다. |
임진왜란기 | 보령 성주사 건물이 크게 소실되었다. |
1984년 | 사적 제 307호로 지정되었다. |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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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석등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석계단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무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인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무염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보령 성주사지 | 구산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성주산문 | 구산선문 | A는 B에 포함된다 | |
성주산문 | 선종 | A는 B에 포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