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륜행실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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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김안국이 올린 상소의 내용에 따르면 1516년 12월 밀양부 풍각현의 박군효가 시내에서 아비의 머리를 난타하여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의 동생들은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은 박군효를 잡았다가 풀어주어 죄를 면하게 하였다. 후에 이 일이 발각되어 옥사에 수감되었으나 죄를 벌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ref>『중종실록』</ref> | 1517년 김안국이 올린 상소의 내용에 따르면 1516년 12월 밀양부 풍각현의 박군효가 시내에서 아비의 머리를 난타하여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의 동생들은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은 박군효를 잡았다가 풀어주어 죄를 면하게 하였다. 후에 이 일이 발각되어 옥사에 수감되었으나 죄를 벌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ref>『중종실록』</ref> | ||
<br/>『이륜행실도』는 서문에서 『삼강행실도』의 체제를 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고 밝힌 바와 같이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각기 그 행적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며 두주에 언해를 첨부하였다. 『삼강행실도』에 이미 효(孝), 충(忠), 열(烈)이 뛰어난 사람의 항목이 충분히 실려 있었기 때문에 세 가지는 제외되었고 대신 형제, 종족 붕우 사생의 순서로 총 48개의 기사 내용을 수록하였다. 다만 우리 나라의 사례와 중국의 사례가 섞여 있던 『삼강행실도』와는 달리 『이륜행실도』는 오직 중국의 사례만을 차용하였는데 이는 효(孝), 충(忠), 열(烈)은 그 행실을 가려 정표한 사례가 있으나 형제, 붕우 등은 정표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ref>이영희, 『행실도류 언해의 분석적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1</ref> | <br/>『이륜행실도』는 서문에서 『삼강행실도』의 체제를 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고 밝힌 바와 같이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각기 그 행적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며 두주에 언해를 첨부하였다. 『삼강행실도』에 이미 효(孝), 충(忠), 열(烈)이 뛰어난 사람의 항목이 충분히 실려 있었기 때문에 세 가지는 제외되었고 대신 형제, 종족 붕우 사생의 순서로 총 48개의 기사 내용을 수록하였다. 다만 우리 나라의 사례와 중국의 사례가 섞여 있던 『삼강행실도』와는 달리 『이륜행실도』는 오직 중국의 사례만을 차용하였는데 이는 효(孝), 충(忠), 열(烈)은 그 행실을 가려 정표한 사례가 있으나 형제, 붕우 등은 정표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ref>이영희, 『행실도류 언해의 분석적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1</ref> | ||
− | 『이륜행실도』가 처음 간행된 곳은 금산(金山, 현재 금천)으로서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편찬이 이뤄진 까닭은 『이륜행실도』의 간행을 주장, 주관했던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륜행실도』는 초간본 간행 이후 여러 차례 재간되었는데 모든 책의 재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실록에 간행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만 살펴 보면 | + | 『이륜행실도』가 처음 간행된 곳은 금산(金山, 현재 금천)으로서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편찬이 이뤄진 까닭은 『이륜행실도』의 간행을 주장, 주관했던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륜행실도』는 초간본 간행 이후 여러 차례 재간되었는데 모든 책의 재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실록에 간행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만 살펴 보면 1539년(중종 34)년의 중간본, 1579년 (선조 12)년의 개간본, 1606년(선조 39)년의 간본, 1727년(영조 3)의 기영본, 1730년(영조 6)의 각도감영본이다. 이 중 현재까지 판본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중간본, 개간본, 기영본, 각도감영본이다. 중간본은 이언직이 내사(內賜)로 받은 수탁본으로 현재 경상북도 월성군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독락당(獨樂堂)에 판본이 보관외어 있다. 옥산서원은 이언직을 제향하는 곳이며 독락당은 이언직이 거처하던 곳이다. 개간본은 교서관에서 간행하여 김성일(金誠一)에게 내사하였고 현재는 안동에 위치한 그의 종가에서 보관중이다. 선조 39년의 간본은 재간을 윤허한다는 기록은 있으나 인출되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이며 아마 왜란과 호란 이후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 인쇄 단계에는 돌입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영본은 기영(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던 평양도감영)에서 간행하여 중앙으로 보내진 지방본이며 기록상에는 없지만 현재 규장각에서 간행기가 있는 판본을 보관하고 있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각도감영본의 경우는 『삼강행실도』를 재간행 한다는 기록만 존재하지만 이 시기 간행된 책이 여러 권 현존하는데다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는 항상 같이 간행되었으므로 이 시기의 『이륜행실도』 간행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 이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오륜행실도』를 편찬했고 이후로는 『오륜행실도』만 재간행되었다. 사실상 이륜행실도의 마지막 간행본이라고 할 수 있다.<ref>송종숙, 「「二倫行實圖」考」, 『서지학연구』 제4집, 1989.</ref> |
==시각자료== | ==시각자료== |
2017년 4월 6일 (목) 17:50 판
이륜행실도 | |
한자명칭 | 二倫行實圖 |
---|---|
영문명칭 | Illustrated stories exemplifying the two Confucian virtues |
작자 | 조신 |
작성시기 | 조선전기 |
간행시기 | 1518년(중종13) |
소장처 | 여주이씨 옥산 독락당 이해철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9.1×22.1㎝ |
판본 | 목판본 |
수량 | 1冊 |
표기문자 | 한글 |
정의
조신이 중종의 명으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윤리를 진작하기 위하여 만든 책
내용
조신曺伸, 1454~1529이 중종의 명으로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윤리를 진작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다. 이 책은 1518년 경상도 김산군金山郡: 지금의 金泉에서 간행한 초간본이며 현재 알려진 국내 소장본 중 가장 빠른 본으로, 이언적의 수택본手澤本이다. 본문 각 장의 전면에는 그림이 수록되고, 그림의 상단 여백에 언해가 수록되었다. 후면에는 한문으로 작성한 사적事跡과 시찬詩贊이 있다. 이 책의 간행에 앞서 1434년세종16에 간행되었던『삼강행실도』는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장유와 붕우의 윤리를 더하여 오륜도五倫圖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장유와 붕우의 행실이 뛰어난 역대 명현의 행적을 선정했는데, 형제도兄弟圖에는 종족도宗族圖를, 붕우도朋友圖에는 사생 도師生圖를 추가하였다. 형제도에 25명, 종족도에 7명, 붕우도에 11명, 사생도에 5명 등 모두 48명의 명현이 수록되어 있다.『 이륜행실도』에 실려 있는 도판 및 언해는 조선시대 판화의 변천 및 국어사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시대 의 유학사상 및 윤리관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1]
부연설명
『이륜행실도』는 1518년 김안국(金安國)이 올린 상소에 의해 편찬되었다. 중종은 평소 도덕 부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삼강오륜을 통한 유교윤리의 부흥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 여기고 있었다. 당시 이미 삼강행실도가 간행되어 삼강에 대한 이해는 시켰지만 오륜 중 이륜인 붕우와 장유에 대해서는 따로 편찬된 교화서가 없었기에 『이륜행실도』를 간행한 것이다. 한편 이 책을 간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박군효의 패륜사건이다. [2]
1517년 김안국이 올린 상소의 내용에 따르면 1516년 12월 밀양부 풍각현의 박군효가 시내에서 아비의 머리를 난타하여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했는데 그의 동생들은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은 박군효를 잡았다가 풀어주어 죄를 면하게 하였다. 후에 이 일이 발각되어 옥사에 수감되었으나 죄를 벌하기도 전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이륜행실도』는 서문에서 『삼강행실도』의 체제를 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고 밝힌 바와 같이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가려 각기 그 행적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리며 두주에 언해를 첨부하였다. 『삼강행실도』에 이미 효(孝), 충(忠), 열(烈)이 뛰어난 사람의 항목이 충분히 실려 있었기 때문에 세 가지는 제외되었고 대신 형제, 종족 붕우 사생의 순서로 총 48개의 기사 내용을 수록하였다. 다만 우리 나라의 사례와 중국의 사례가 섞여 있던 『삼강행실도』와는 달리 『이륜행실도』는 오직 중국의 사례만을 차용하였는데 이는 효(孝), 충(忠), 열(烈)은 그 행실을 가려 정표한 사례가 있으나 형제, 붕우 등은 정표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4]
『이륜행실도』가 처음 간행된 곳은 금산(金山, 현재 금천)으로서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편찬이 이뤄진 까닭은 『이륜행실도』의 간행을 주장, 주관했던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륜행실도』는 초간본 간행 이후 여러 차례 재간되었는데 모든 책의 재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실록에 간행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만 살펴 보면 1539년(중종 34)년의 중간본, 1579년 (선조 12)년의 개간본, 1606년(선조 39)년의 간본, 1727년(영조 3)의 기영본, 1730년(영조 6)의 각도감영본이다. 이 중 현재까지 판본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중간본, 개간본, 기영본, 각도감영본이다. 중간본은 이언직이 내사(內賜)로 받은 수탁본으로 현재 경상북도 월성군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독락당(獨樂堂)에 판본이 보관외어 있다. 옥산서원은 이언직을 제향하는 곳이며 독락당은 이언직이 거처하던 곳이다. 개간본은 교서관에서 간행하여 김성일(金誠一)에게 내사하였고 현재는 안동에 위치한 그의 종가에서 보관중이다. 선조 39년의 간본은 재간을 윤허한다는 기록은 있으나 인출되었다는 기록은 없는 것이며 아마 왜란과 호란 이후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 인쇄 단계에는 돌입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영본은 기영(지금의 평양에 위치했던 평양도감영)에서 간행하여 중앙으로 보내진 지방본이며 기록상에는 없지만 현재 규장각에서 간행기가 있는 판본을 보관하고 있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각도감영본의 경우는 『삼강행실도』를 재간행 한다는 기록만 존재하지만 이 시기 간행된 책이 여러 권 현존하는데다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는 항상 같이 간행되었으므로 이 시기의 『이륜행실도』 간행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 이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하여 『오륜행실도』를 편찬했고 이후로는 『오륜행실도』만 재간행되었다. 사실상 이륜행실도의 마지막 간행본이라고 할 수 있다.[5]
시각자료
관련 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중종 | 이륜행실도 | A는 B의 편찬을 명했다 | 1518년 |
조신 | 이륜행실도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518년 |
삼강행실도 | 이륜행실도 | A는 B의 모델이다 | |
김안국 | 이륜행실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박군효 | 김안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박군효 | 이륜행실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오륜행실도 | 이륜행실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삼강행실도 | 오륜행실도 | A는 B의 모델이다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518년 | 중종의 명으로 이륜행실도 이 간행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129.159905 | 36.016820 | 여주이씨 독산 독락당에 삼강행실도가 소장되어 있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 논문
- 안병희,「이륜행실도 해제」, 『동양학총서』, 1978
-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