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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정운]]』은 홍무8년(1375)년에 [[홍무제]](洪武帝,1368~1398 )가 악소봉(樂韶鳳) 송렴(宋濂)에게 명하여 만들어진 흠정운서(欽定韻書)이며, 『홍무정운역훈』은 [[세종]](世宗, 1418~1450)에 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조대음운서이다. 편찬이 완료된 시기는 세종이 승하한 이후 [[단종]](단종, 3) 1455년에 이루어졌다.  
 
『[[홍무정운]]』은 홍무8년(1375)년에 [[홍무제]](洪武帝,1368~1398 )가 악소봉(樂韶鳳) 송렴(宋濂)에게 명하여 만들어진 흠정운서(欽定韻書)이며, 『홍무정운역훈』은 [[세종]](世宗, 1418~1450)에 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조대음운서이다. 편찬이 완료된 시기는 세종이 승하한 이후 [[단종]](단종, 3) 1455년에 이루어졌다.  
  
홍무제가 『[[홍무정운]]』을 편찬 한 목적은 명나라 초기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시작한 문화 사업으로 국가의 표준음을 제정하려던 것이었다. 이른바 옛 원(元, 1279~1368)나라의 낡은 운서에서 벗어나 “중원아음(中原雅音)”모델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南宋, 1127~1279)시기 모황(毛晃), 모거정(毛居正) 부자가 지은 『증수호주예부운략(增修互註禮部韻略)』 토대로 하지만, 음부(音部) 파트를 뜯어 고쳐 “중원아음(中原雅音)” 모델에 맞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 하였고 그 결과 『홍무정운역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증수호주예부운략』이 중국의 남방음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편찬자 역시 남방지방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남송의 영역은 애초에 화북까지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 중심부터 오(吳, 절강 북부 및 상해지역), 월(越, 절강 중부지역)이었다. 그리고 당시 명나라 세력도 완벽하게 북방까지 미치지 않는 상황이어서 “중원아음”자체가 전 중국에 교체되기는 시간이 일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물은 옛 운음과 남쪽과 북방 운음이 뒤섞인 정리되지 않은 모양의 운서(韻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온 운서(韻書)는 홍무제 자신도 납득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하들을 독촉하여 수정본을 만들었지만 기초 운서부터 잘못 잡은 『[[홍무정운]]』은 더 나은 연구서로 간행될 수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홍무제가 신하들에게 준 기간도 문제가 많았다. 거국적인 국가사업을 단 반년 만에 끝내버리라고 명령한 것이다. 실제 『[[홍무정운]]』은 홍무 8년(1375) 7월에 제작을 시작하여 그해 12월에 끝나버렸다. 그 결과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대 음운학자들은 『[[홍무정운]]』을 실패작으로 보고 연구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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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가 『[[홍무정운]]』을 편찬 한 목적은 명나라 초기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시작한 문화 사업으로 국가의 표준음을 제정하려던 것이었다. 이른바 옛 원(元, 1279~1368)나라의 낡은 운서에서 벗어나 “중원아음(中原雅音)”모델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南宋, 1127~1279)시기 모황(毛晃), 모거정(毛居正) 부자가 지은 『증수호주예부운략(增修互註禮部韻略)』 토대로 하지만, 음부(音部) 파트를 뜯어 고쳐 “중원아음(中原雅音)” 모델에 맞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 하였고 그 결과 『홍무정운역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증수호주예부운략』이 중국의 남방음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편찬자 역시 남방지방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남송의 영역은 애초에 화북까지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 중심부터 오(吳, 절강 북부 및 상해지역), 월(越, 절강 중부지역)이었다. 그리고 당시 명나라 세력도 완벽하게 북방까지 미치지 않는 상황이어서 “중원아음”자체가 전 중국에 교체되기는 시간이 일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물은 옛 운음과 남쪽과 북방 운음이 뒤섞인 정리되지 않은 모양의 운서(韻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온 운서(韻書)는 홍무제 자신도 납득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하들을 독촉하여 수정본을 만들었지만 기초 운서부터 잘못 잡은 『[[홍무정운]]』은 더 나은 연구서로 간행될 수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홍무제가 신하들에게 준 기간도 문제가 많았다. 거국적인 국가사업을 단 반년 만에 끝내버리라고 명령한 것이다. 실제 『[[홍무정운]]』은 홍무 8년(1375) 7월에 제작을 시작하여 그해 12월에 끝나버렸다. 그 결과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대 음운학자들은 『[[홍무정운]]』을 실패작으로 보고 연구하지도 않았다.<REF>김기석, 「《홍무정훈역훈》과 《홍무정운》의 관계 및 문헌가치에 대한 고찰」, 『중국조선어문』 vol 193, 2014, 10~1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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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홍무정운역훈』의 경우는 정 반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겠다. 1446(세종,28)년 『훈민정음』이 창제 되었고, 1447(세종, 29) [[『동국정운』]]이 만들어졌으며, 1년 후에는 [[『홍무정운역훈』]] 간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 문자 창제와 중국 한자음 표준화를 정립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3년  안에 연속적인 국가 정책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중기부터 중국에서 전파된 운서(韻書)들 때문에 음운학 연구가 축적되고 있었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이런 연구 축적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홍무정운]]』을 들여온 이후 그들은 큰 난관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이유는 『[[홍무정운]]』 자체가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운서(韻書)가 아니었고 심지어 당시 현지에서 사용하는 연경어(燕京語, 북경어)와도 너무 틀려서 기준을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국(上國)에서 만들어진 『[[홍무정운]]』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새로운 운서(韻書)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조선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세종과 집현전 사람들은 『[[홍무정운]]』을 기본으로 하면서 중국의 북방 남방 음운을 다 취합하는 거대한 작전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세종은 신하들을 중국에 총 7~8차례 보내면서 북경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현지 운음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홍무정운]]』 원작 음(남방음)을 가져오면서 북방음을 대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안 해낸 방법은 바로 『[[홍무정운]]』의 분절음과 북방의 시음을 동시 표기하는 2중 표기체제로 확정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홍무정운]]』의 내용 자체가 너무 방대하여 조선 사람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종은 『[[홍무정운]]』의 색인 격인 [[『사성통고』]]를 편찬하도록 [[신숙주]]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당시 [[『홍무정운역훈』]]이 제작되고 있을 때 색인 사서 작업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찬 기간도 『[[홍무정운]]』에 비해서 매우 길었다. 1448년(세종, 30)에서 1455년(단종, 3)까지 약 8년간 수차례 수정을 거듭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 결과 『[[홍무정운]]』과는 다른 비평의 [[『홍무정운역훈』]]이 탄생된 것이다.<REF>김기석, 「《홍무정훈역훈》과 《홍무정운》의 관계 및 문헌가치에 대한 고찰」, 『중국조선어문』 vol 193, 2014, 10~16쪽.</REF>
 
반면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홍무정운역훈』의 경우는 정 반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겠다. 1446(세종,28)년 『훈민정음』이 창제 되었고, 1447(세종, 29) [[『동국정운』]]이 만들어졌으며, 1년 후에는 [[『홍무정운역훈』]] 간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 문자 창제와 중국 한자음 표준화를 정립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3년  안에 연속적인 국가 정책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중기부터 중국에서 전파된 운서(韻書)들 때문에 음운학 연구가 축적되고 있었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이런 연구 축적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홍무정운]]』을 들여온 이후 그들은 큰 난관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이유는 『[[홍무정운]]』 자체가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운서(韻書)가 아니었고 심지어 당시 현지에서 사용하는 연경어(燕京語, 북경어)와도 너무 틀려서 기준을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국(上國)에서 만들어진 『[[홍무정운]]』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새로운 운서(韻書)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조선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세종과 집현전 사람들은 『[[홍무정운]]』을 기본으로 하면서 중국의 북방 남방 음운을 다 취합하는 거대한 작전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세종은 신하들을 중국에 총 7~8차례 보내면서 북경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현지 운음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홍무정운]]』 원작 음(남방음)을 가져오면서 북방음을 대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안 해낸 방법은 바로 『[[홍무정운]]』의 분절음과 북방의 시음을 동시 표기하는 2중 표기체제로 확정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홍무정운]]』의 내용 자체가 너무 방대하여 조선 사람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종은 『[[홍무정운]]』의 색인 격인 [[『사성통고』]]를 편찬하도록 [[신숙주]]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당시 [[『홍무정운역훈』]]이 제작되고 있을 때 색인 사서 작업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찬 기간도 『[[홍무정운]]』에 비해서 매우 길었다. 1448년(세종, 30)에서 1455년(단종, 3)까지 약 8년간 수차례 수정을 거듭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 결과 『[[홍무정운]]』과는 다른 비평의 [[『홍무정운역훈』]]이 탄생된 것이다.<REF>김기석, 「《홍무정훈역훈》과 《홍무정운》의 관계 및 문헌가치에 대한 고찰」, 『중국조선어문』 vol 193, 2014, 10~16쪽.</REF>

2017년 4월 7일 (금) 20:38 판

홍무정운역훈
한글팀 홍무정운역훈 05 팔진.jpg
한자명칭 洪武正韻譯訓
영문명칭 A Korean translated and annotated book of a Chinese phonological book Hongmujeongun
작자 신숙주, 성삼문, 조변안, 김증, 손수산
작성시기 1448(세종30) 착수
간행시기 1455(단종3)
소장처 고려대학교도서관
문화재지정사항 보물 제417호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3.0×20.2㎝
판본 목활자본(大字), 금속활자본(小字)
수량 8책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중국의 음운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책이다.

내용

중국의 음운서인 『홍무정운』을 한글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책이다. 『홍무정운』은 중국 한자의 표준음을 기록한 책이다. 세종은 중국의 한자음을 한글로 올바로 표기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홍무정운역훈』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1447년(세종 29) 『동국정운』의 간행 이후,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해 『홍무정운』의 음을 한글로 나타낼 목적으로 1455년(단종 3) 16권 8책으로 완성되었다. 현재 1책인 권 1과 권 2는 없어지고 권 3에서 권 16까지 14권 7책만 남아 있다. 한글과 한자, 큰 글자는 목활자로, 작은 글자는 갑인자로 찍었다. 또한 이 책을 편찬한 취지, 연기 등이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 권 15의 「홍무정운역훈서」에 기록되어 있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당시의 국어학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1]

부연설명

홍무정운』은 홍무8년(1375)년에 홍무제(洪武帝,1368~1398 )가 악소봉(樂韶鳳) 송렴(宋濂)에게 명하여 만들어진 흠정운서(欽定韻書)이며, 『홍무정운역훈』은 세종(世宗, 1418~1450)에 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조대음운서이다. 편찬이 완료된 시기는 세종이 승하한 이후 단종(단종, 3) 1455년에 이루어졌다.

홍무제가 『홍무정운』을 편찬 한 목적은 명나라 초기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시작한 문화 사업으로 국가의 표준음을 제정하려던 것이었다. 이른바 옛 원(元, 1279~1368)나라의 낡은 운서에서 벗어나 “중원아음(中原雅音)”모델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南宋, 1127~1279)시기 모황(毛晃), 모거정(毛居正) 부자가 지은 『증수호주예부운략(增修互註禮部韻略)』 토대로 하지만, 음부(音部) 파트를 뜯어 고쳐 “중원아음(中原雅音)” 모델에 맞게 교정하는 작업에 착수 하였고 그 결과 『홍무정운역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증수호주예부운략』이 중국의 남방음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편찬자 역시 남방지방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남송의 영역은 애초에 화북까지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 중심부터 오(吳, 절강 북부 및 상해지역), 월(越, 절강 중부지역)이었다. 그리고 당시 명나라 세력도 완벽하게 북방까지 미치지 않는 상황이어서 “중원아음”자체가 전 중국에 교체되기는 시간이 일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물은 옛 운음과 남쪽과 북방 운음이 뒤섞인 정리되지 않은 모양의 운서(韻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나온 운서(韻書)는 홍무제 자신도 납득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하들을 독촉하여 수정본을 만들었지만 기초 운서부터 잘못 잡은 『홍무정운』은 더 나은 연구서로 간행될 수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홍무제가 신하들에게 준 기간도 문제가 많았다. 거국적인 국가사업을 단 반년 만에 끝내버리라고 명령한 것이다. 실제 『홍무정운』은 홍무 8년(1375) 7월에 제작을 시작하여 그해 12월에 끝나버렸다. 그 결과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대 음운학자들은 『홍무정운』을 실패작으로 보고 연구하지도 않았다.[2]


반면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홍무정운역훈』의 경우는 정 반대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겠다. 1446(세종,28)년 『훈민정음』이 창제 되었고, 1447(세종, 29) 『동국정운』이 만들어졌으며, 1년 후에는 『홍무정운역훈』 간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 문자 창제와 중국 한자음 표준화를 정립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3년 안에 연속적인 국가 정책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 중기부터 중국에서 전파된 운서(韻書)들 때문에 음운학 연구가 축적되고 있었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이런 연구 축적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홍무정운』을 들여온 이후 그들은 큰 난관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이유는 『홍무정운』 자체가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운서(韻書)가 아니었고 심지어 당시 현지에서 사용하는 연경어(燕京語, 북경어)와도 너무 틀려서 기준을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국(上國)에서 만들어진 『홍무정운』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새로운 운서(韻書) 체계를 만든다는 것은 조선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세종과 집현전 사람들은 『홍무정운』을 기본으로 하면서 중국의 북방 남방 음운을 다 취합하는 거대한 작전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세종은 신하들을 중국에 총 7~8차례 보내면서 북경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현지 운음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홍무정운』 원작 음(남방음)을 가져오면서 북방음을 대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안 해낸 방법은 바로 『홍무정운』의 분절음과 북방의 시음을 동시 표기하는 2중 표기체제로 확정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홍무정운』의 내용 자체가 너무 방대하여 조선 사람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종은 『홍무정운』의 색인 격인 『사성통고』를 편찬하도록 신숙주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당시 『홍무정운역훈』이 제작되고 있을 때 색인 사서 작업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찬 기간도 『홍무정운』에 비해서 매우 길었다. 1448년(세종, 30)에서 1455년(단종, 3)까지 약 8년간 수차례 수정을 거듭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 결과 『홍무정운』과는 다른 비평의 『홍무정운역훈』이 탄생된 것이다.[3]

시각자료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홍무정운역훈 홍무정운 A는 B를 기초로 하였다
악소봉 홍무정운 A는 B를 편찬했다
송렴 홍무정운 A는 B를 편찬했다
세종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홍무제 악소봉 A는 B에게 명령했다
홍무제 송렴 A는 B에게 명령했다
신숙주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집현전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성삼문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조변안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김증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손수산 홍무정운역훈 A는 B를 편찬했다
모황 증수호주예부운략 A는 B를 편찬했다
모거정 증수호주예부운략 A는 B를 편찬했다
모황 모거정 A는 B의 아버지다
증수호주예부운략 A는 B에게 영향을 주었다
증수호주예부운략 A는 B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서통고 홍무정운역훈 A는 B의 색인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48(세종, 30) 홍무정운역훈을 착수하였다
1455(단종, 3) 홍무정운역훈을 간행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9126 127.034039 홍무정운역훈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 논문
    1. 김기석, 「《홍무정훈역훈》과 《홍무정운》의 관계 및 문헌가치에 대한 고찰」, 『중국조선어문』 vol 193, 2014, 10~16쪽.
    2. 李崇寧, 「洪武正韻譯訓의 硏究」, 『진단학보』 권20, 1959, 115-179쪽.
    3. 강신항, 「최세진의 음운 연구」, 『새국어생활』 Vol9 No3, 1999, 55-68쪽.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3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2. 김기석, 「《홍무정훈역훈》과 《홍무정운》의 관계 및 문헌가치에 대한 고찰」, 『중국조선어문』 vol 193, 2014, 10~16쪽.
  3. 김기석, 「《홍무정훈역훈》과 《홍무정운》의 관계 및 문헌가치에 대한 고찰」, 『중국조선어문』 vol 193, 2014, 10~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