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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비어천가』는 목판본 총 10권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목판본이나 [[세종]](世宗, 1418~1450) 시기 초간본은 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는 『가람문고본』, 『일사문고본』, 『규장각본』이 있다. 원본에 가까운 것은 『가람문고본』이나 1~2권 밖에 없으며 『규장각본』도 후쇄본이어서 탈자와 탈 획이 많다. 이 밖에도 『세종실록』에 실린 『실록본』이 있으며 1612년(광해군, 4)에 간행된 『만력본』, 1659년(효종, 10)에 간행된 『순치본』,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건륭본』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만력본』은 규장각도서의 『태백산본』과 『오대산본』 두 종류가 있다. 일제시대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오대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기타 판본과 비교하고 수정 보완하여 영인한 일이 있었다. | ||
+ |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덕을 쌓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 왕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공덕을 지키고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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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용비어천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와 끄트머리에 실린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에 잘 나타나 있다. 첫머리 글에 따르면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이 조선 군왕의 여섯 대 선조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었는데 이 때가 바로 1445년(세종, 27) 4월 이었다. 이때 지은 노래가 우리말로 되어 있고 거기에 한문시를 달아서 뜻을 풀이하였다. 그리고 끄트머리의 글을 보면 그 시기가 2년 후 1447년(세종, 29) 2월이다. 그 내용을 보면, 1445년에 [[권제]], [[정인지]], [[안지]]가 125장의 노래를 지어 올리니 세종이 기뻐하며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지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을 보면, 역사적 사실은 역사책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다 펴보기 어려우니 [[박팽년]](朴彭年), [[강희안]](姜希顔), [[신숙주]](申叔舟), [[이현로]](李賢老),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영손]](辛永孫) 들에게 주해를 붙이게 하여 10권의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다시 말하면 1445년에 노래 본문과 한시가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을 한문으로 기록된 것은 1447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9509 용비어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4월 2일 확인.</REF> | ||
==관련항목== | ==관련항목== |
2017년 4월 2일 (일) 18:38 판
용비어천가 | |
한자명칭 | 龍飛御天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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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ongs of the Dragons Flying to Heaven, the first work written in hangeul. A book introducing the works of 6 kings of Joseon, from Mokjo to Taejong, and the corresponding kings of China. It is composed of poems and annotations. |
작자 | 권제 등 찬 |
간행시기 | 1445년 초간, 1659년(효종10) 중간본 |
소장처 | 국립한글박물관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4.5×22.5㎝ |
판본 | 목판본 |
수량 | 5책 |
표기문자 | 한자, 한글 |
정의
조선의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까지 6대에 걸친 사적(事跡)과 그에 대응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로 하여 읊은 시와 주석을 수록한 책이다.
내용
조선의 목조(穆祖)부터 태종(太宗)까지 6대에 걸친 사적(事跡)과 그에 대응되는 중국 역대 제왕의 사적을 대구로 하여 읊은 시와 주석을 수록한 책이다. 125장의 한글 가사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를 본문으로 하고, 각 장마다 주해를 붙였다. 이 책은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여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밝혔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덕을 쌓아 천명을 받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후대 임금은 선조들이 이렇듯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무너뜨리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본문에는 한문식 표현과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어 현대어의 문체와 비슷하며, 약 450여 개 정도의 순수 고유어가 사용되었다. 『용비어천가』는 한글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문헌으로 한글 사용의 가장 오래된 용례를 보여주며, 주해 속에 나오는 고유명사, 관직명의 한글표기는 국어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1]
부연설명
『용비어천가』는 목판본 총 10권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목판본이나 세종(世宗, 1418~1450) 시기 초간본은 활자본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는 『가람문고본』, 『일사문고본』, 『규장각본』이 있다. 원본에 가까운 것은 『가람문고본』이나 1~2권 밖에 없으며 『규장각본』도 후쇄본이어서 탈자와 탈 획이 많다. 이 밖에도 『세종실록』에 실린 『실록본』이 있으며 1612년(광해군, 4)에 간행된 『만력본』, 1659년(효종, 10)에 간행된 『순치본』, 1765년(영조, 41)에 간행된 『건륭본』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만력본』은 규장각도서의 『태백산본』과 『오대산본』 두 종류가 있다. 일제시대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오대산본』을 저본으로 하여 기타 판본과 비교하고 수정 보완하여 영인한 일이 있었다.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덕을 쌓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 왕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공덕을 지키고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비어천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진용비어천가전(進龍飛御天歌箋)」와 끄트머리에 실린 「용비어천가발(龍飛御天歌跋)」에 잘 나타나 있다. 첫머리 글에 따르면 권제(權踶),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등이 조선 군왕의 여섯 대 선조들의 행적을 125장의 노래로 읊었는데 이 때가 바로 1445년(세종, 27) 4월 이었다. 이때 지은 노래가 우리말로 되어 있고 거기에 한문시를 달아서 뜻을 풀이하였다. 그리고 끄트머리의 글을 보면 그 시기가 2년 후 1447년(세종, 29) 2월이다. 그 내용을 보면, 1445년에 권제, 정인지, 안지가 125장의 노래를 지어 올리니 세종이 기뻐하며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지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을 보면, 역사적 사실은 역사책에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이 다 펴보기 어려우니 박팽년(朴彭年), 강희안(姜希顔), 신숙주(申叔舟), 이현로(李賢老),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신영손(辛永孫) 들에게 주해를 붙이게 하여 10권의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다시 말하면 1445년에 노래 본문과 한시가 만들어졌고, 역사적 사실을 한문으로 기록된 것은 1447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관련항목
중심 | 관계어 정의 | 대상 |
---|---|---|
용비어천가 | 작자 | 권제 |
용비어천가 | 작자 | 정인지 |
용비어천가 | 작자 | 안지 |
용비어천가 | 작자 | 박팽년 |
용비어천가 | 작자 | 강희안 |
용비어천가 | 작자 | 신숙주 |
용비어천가 | 작자 | 이현로 |
용비어천가 | 작자 | 성삼문 |
용비어천가 | 작자 | 이개 |
용비어천가 | 작자 | 신영손 |
용비어천가 | 소재 | 목조 |
용비어천가 | 소재 | 익조 |
용비어천가 | 소재 | 도조 |
용비어천가 | 소재 | 환조 |
용비어천가 | 소재 | 태조 |
용비어천가 | 소재 | 태종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용비어천가 | 초간연대 | 1445년 |
용비어천가 | 중간연대 | 1659년(효종10)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용비어천가 | 소장처 | 국립한글박물관 | 126.980956 | 37.5217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