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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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 = Park Suk Ho | |영문명 = Park Suk Ho | ||
|출생 - 사망 = 1921년 7월 9일 - 1994년 5월 20일 | |출생 - 사망 = 1921년 7월 9일 - 1994년 5월 20일 | ||
− | |출생지 = 옥천 | + | |출생지 = 충북 옥천 |
|국적 = 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
|분야 = 서양화가 | |분야 = 서양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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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 =='''작가소개'''== | ||
+ | 호적상 1919년이지만 그의 작가 연보에 나와 있는 출생연대는 1921년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이원면은 이남면과 이내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가 태어난 주소는 이남면 건진리다. 아버지 박장흠은 4대 독자로, 손이 귀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두 형제였지만 형 박병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서는 그의 행적을 증언해 줄 만한 친적을 만날 수가 없다. 다만,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가 선대를 이어 살던 곳이었고, 어머니가 옥천 이원에서 박석호를 낳았다.<br/> | ||
+ | 1949년 박석호는 화가의 꿈을 이루겠다는 신념을 갖고 무작정 상경하여 처음으로 생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1회 신입생으로 입학,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53년 졸업하게 되고, 졸업과 동시에 학교 조교로 근무하면서 스스로 '인간적 감화를 받았다'는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다. 김환기는 박석호가 너무 착하다며 차게 살라며 한원(寒園)이라는 호를 지어주게 되었다고 전한다. 박석호는 1954년 홍익대를 졸업 하면서 모교 조교수로 첫 출발을 했지만, 1965년 말에 학내 교수 파동으로 당시 서양화과 학과장이었던 이봉상 교수와 함께 퇴직하게 된다. 그 후, 이봉상 교수와 함께 운영하던 국제미술학원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br/> | ||
+ | 그는 1956년 8월 신인회 창립회원이 되어 창립전에 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신인회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를 박석호 예술세계의 1기라고 미술계에서는 본다. 박석호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며 진솔하게 자기의 시대를 살다가 갔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소위 잘 나가는 작가가 아니었던 그는 국전에 출품한 적도 현대 미술위 시류에 따라 발맞추어 간적도 없다.<br/> | ||
+ | 한국 서양화 화단이 사실과 추상이라는 미술양식의 이분법적 형식에 양분되어 갈 때, 박 화백의 당시의 그림은 사실과 추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중용적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 화백의 화풍은 엄밀히 말할 때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구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구상은 사실과 달리 객관적인 진실을 존중하지만 눈에 비치는 그대로가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을 통한 자연의 긍정이기 때문이다.<br/> | ||
+ | 그는 서민의 생활을 보다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동해안과 남해안일대를 순회여행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촌' `포구' `어부들' `해변' `입항' `부두' `기다리는 사람들'의 작품을 쏟아냈다.<br/> | ||
+ | 그런 그를 세상 위로 끌어 올린 것은 1996년 4월 12일부터 5월 1일까지 19일간 예술의 전당이 개최한 재조명 작가전 첫 순서로 박석호전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재조명 작가전은 박석호라는 화가가 어느 누구의 화풍이나 계열에도 이름을 내지 않고 있으나 이미 한국 미술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br/> | ||
+ | 화단의 야인(野人)으로 불려졌던 박화백이었지만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자기세계를 구축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지난 82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때는 회화분과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바다와는 전연 관련이 없고 바다와는 거리가 먼 고향에서 태어났음에도 그의 그림소재는 배와 포구 등 바다를 소재로 한 것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 까닭에 대해 그는 1979년 어느 여성 월간지의 기고를 통해 이렇게 썼다. | ||
+ | 내가 두메산골의 농촌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바다를 동경한 탓인가 아니면 가장 젊음을 구가했어야 할 무렵에 피난지 부산에서 자갈치 시장에 맛을 들인 탓일까! 어떻든 바다와 섬마을과 나와는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이 어려울 때엔 고향처럼 포구와 어촌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바닷가에 화실을 가지라는 권고를 받아들이고 싶은 뜻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리움을 빼앗길 것 같다. 그리움을 빼앗긴 인간이란 희망없이 사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그리움이 있기에 그것을 만족시키는 씁쓸한 환희가 있는 것이 아닌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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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석호의 작품에서 그의 새롭고 독자적인 공간성이란, 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개별적인 심성과 감수성에 기초하여 자연의 대상적 세계나 사물의 형상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현대회화의 초기에 야수파가 도달한 강렬한 표현적 충동이나 에너지 같은 것이 담겨 있다."(미술평론가:김인환)는 말처럼 그의 회화는 그 자신만의 심중에서 울려 퍼지는 마음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
+ | 그래서 시류에 영합함이 없이 사회적 명예와도 담을 쌓고 오직 자기사고와 자기 방식대로만 작품을 했던 박석호는 1992년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1년 반 동안의 투병 끝에 1994년 임종을 맞이 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북한산 비봉자락에 뿌려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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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6일 (일) 23:02 판
작가소개
호적상 1919년이지만 그의 작가 연보에 나와 있는 출생연대는 1921년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이원면은 이남면과 이내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가 태어난 주소는 이남면 건진리다. 아버지 박장흠은 4대 독자로, 손이 귀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두 형제였지만 형 박병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서는 그의 행적을 증언해 줄 만한 친적을 만날 수가 없다. 다만,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가 선대를 이어 살던 곳이었고, 어머니가 옥천 이원에서 박석호를 낳았다.
1949년 박석호는 화가의 꿈을 이루겠다는 신념을 갖고 무작정 상경하여 처음으로 생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1회 신입생으로 입학,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53년 졸업하게 되고, 졸업과 동시에 학교 조교로 근무하면서 스스로 '인간적 감화를 받았다'는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다. 김환기는 박석호가 너무 착하다며 차게 살라며 한원(寒園)이라는 호를 지어주게 되었다고 전한다. 박석호는 1954년 홍익대를 졸업 하면서 모교 조교수로 첫 출발을 했지만, 1965년 말에 학내 교수 파동으로 당시 서양화과 학과장이었던 이봉상 교수와 함께 퇴직하게 된다. 그 후, 이봉상 교수와 함께 운영하던 국제미술학원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는 1956년 8월 신인회 창립회원이 되어 창립전에 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신인회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를 박석호 예술세계의 1기라고 미술계에서는 본다. 박석호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며 진솔하게 자기의 시대를 살다가 갔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소위 잘 나가는 작가가 아니었던 그는 국전에 출품한 적도 현대 미술위 시류에 따라 발맞추어 간적도 없다.
한국 서양화 화단이 사실과 추상이라는 미술양식의 이분법적 형식에 양분되어 갈 때, 박 화백의 당시의 그림은 사실과 추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중용적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 화백의 화풍은 엄밀히 말할 때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구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구상은 사실과 달리 객관적인 진실을 존중하지만 눈에 비치는 그대로가 아니라, 주관적인 해석을 통한 자연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서민의 생활을 보다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동해안과 남해안일대를 순회여행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촌' `포구' `어부들' `해변' `입항' `부두' `기다리는 사람들'의 작품을 쏟아냈다.
그런 그를 세상 위로 끌어 올린 것은 1996년 4월 12일부터 5월 1일까지 19일간 예술의 전당이 개최한 재조명 작가전 첫 순서로 박석호전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재조명 작가전은 박석호라는 화가가 어느 누구의 화풍이나 계열에도 이름을 내지 않고 있으나 이미 한국 미술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화단의 야인(野人)으로 불려졌던 박화백이었지만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자기세계를 구축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지난 82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때는 회화분과 심사위원장을 맡았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바다와는 전연 관련이 없고 바다와는 거리가 먼 고향에서 태어났음에도 그의 그림소재는 배와 포구 등 바다를 소재로 한 것들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 까닭에 대해 그는 1979년 어느 여성 월간지의 기고를 통해 이렇게 썼다.
내가 두메산골의 농촌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바다를 동경한 탓인가 아니면 가장 젊음을 구가했어야 할 무렵에 피난지 부산에서 자갈치 시장에 맛을 들인 탓일까! 어떻든 바다와 섬마을과 나와는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그림이 어려울 때엔 고향처럼 포구와 어촌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바닷가에 화실을 가지라는 권고를 받아들이고 싶은 뜻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리움을 빼앗길 것 같다. 그리움을 빼앗긴 인간이란 희망없이 사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그리움이 있기에 그것을 만족시키는 씁쓸한 환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박석호의 작품에서 그의 새롭고 독자적인 공간성이란, 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개별적인 심성과 감수성에 기초하여 자연의 대상적 세계나 사물의 형상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현대회화의 초기에 야수파가 도달한 강렬한 표현적 충동이나 에너지 같은 것이 담겨 있다."(미술평론가:김인환)는 말처럼 그의 회화는 그 자신만의 심중에서 울려 퍼지는 마음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류에 영합함이 없이 사회적 명예와도 담을 쌓고 오직 자기사고와 자기 방식대로만 작품을 했던 박석호는 1992년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1년 반 동안의 투병 끝에 1994년 임종을 맞이 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북한산 비봉자락에 뿌려졌다.
학력
- 1953년 홍익대학교 학사
경력
- 신상전 및 구상전 창립회원
- 1961년-1966년 홍익대학교 교수
- 1982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전시
- 1956년-1958년, 신인회전, 신세계 화랑
- 1962년, 개인전, 국립도서관 화랑
- 1962년-1963년, 신상회회원전
- 1965년-1966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상파울로
- 1966년, 개인전, 중앙공보관 화랑
- 1967년, 구상전
- 1975년-1976년, 한일 미술 교류전, 갤러리 현대
- 1976년, 한국 현대미술 대전: 서양화, 국립현대미술관
- 1977년, 개인전, 미술회관
- 1977년-1978년, 한국 미술대상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9년, 한국 미술 오늘의 방법전, 미술회관
- 1979년, 한국 근대미술 6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9년, 개인전, 희 화랑
- 1981년, 개인전, 희 화랑
- 1982년, 중진작가 초대전, 롯데 화랑
- 1982년, 살롱 도 똔느, 프랑스 파리
- 1982년, 국제 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3년, 개인전, 동산방 화랑
- 1983년-1985년, `83, `85 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6년,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0년, 한국미술-오늘의 상황전, 예술의전당
- 1990년, `90현대 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2년, 구상 회화 현재전, 청송 갤러리
- 1993년, 구상회화전, 갤러리아 아트홀
- 1993년, 전관 개관 기념 현대미술전, 예술의전당
- 1996년, 개인전, 예술의전당
- 한국 수채화작가회전, 서울 갤러리
수상
주요작품
민족기록화
관련 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
박석호 | 박석호-추풍령싸움 | A는 B를 그렸다 |
박석호 | 한국수채화협회 | A는 B의 회원이다 |
박석호 | 구상화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관계속성 |
---|---|---|---|
박석호 | 박석호-추풍령싸움 | A는 B를 그렸다 | 1975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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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
참고문헌
- "박석호", 『월간미술』, 월간미술. 2017년 03월 26일 확인.
주석
- ↑ balletinet, "화가 할아버지 '박기태 화백', 『BALLETIN』, 게시일: 2012년 09월 11일.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윤정국, "나주 경략 주역은 왕건 아닌 궁예", 『동아일보』, 2001년 4월 24일.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박석호(朴錫浩)", 『옥천문화원 온라인 서비스』, 옥천문화원.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자유로, "2010 이철명 수채화전 주요작 & 초대 출품직", 『자유로의 작은여유』, 2010년 10월 25일.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2004 울산광역시 수채화 협회전,『울산아트닷컴』, 울산갤러리. 2017년 03월 26일 확인."
- ↑ "박기태,『한국미술협회경상북도지회 온라인 서비스』, 한국미술협회경상북도지회. 2017년 03월 26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