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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의 주도로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사장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는점이 특징이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년 이후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의 주도로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사장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는점이 특징이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년 이후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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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7일 (수) 12:25 판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
서상호(徐相灝, 1888년 ~ 1964년 12월 20일[1])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은행 취체역을 맡았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국회의원(통영군 갑) 낙선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국회의원(통영군 갑) 당선
시대일보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의 주도로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사장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는점이 특징이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년 이후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서상환은 고향인 통영에서 5~6만 원 상당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와 협의하였다. 또한 고향에서 동지 규합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나, 1919년 5월 무렵 정진영의 밀고로 서상환을 비롯한 재건 달성친목회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서상환은 9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았고, 1920년 3월 22일 대구고등법원에서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