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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북한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묘역을 가르키는 표지판도 잘 돼 있다. | 북한산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북한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묘역을 가르키는 표지판도 잘 돼 있다. | ||
야외 운동시설인 백운체육회 바로 앞에 있는 곳이 동암 서상일(1887~1962) 선생의 묘이다. 대구 출신으로 1909년 국권회복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과 1910년 광복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대동청년당으로 활동할 때 그는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비겁하다"며 "청년이 비겁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남겼다. | 야외 운동시설인 백운체육회 바로 앞에 있는 곳이 동암 서상일(1887~1962) 선생의 묘이다. 대구 출신으로 1909년 국권회복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과 1910년 광복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대동청년당으로 활동할 때 그는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비겁하다"며 "청년이 비겁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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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상일]](徐相一 1887~1962) | ||
+ | 동암(東庵) [[서상일]](徐相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48년 초대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6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62년에 사망했습니다. |
2024년 2월 2일 (금) 16:52 판
서울 강북구 수유리는 애국지사와 민주열사 등의 묘역이 많다. 4.19국립 민주묘역은 물론 후손이 없는 17위 무후 광복군 합동묘역, 애국선열 묘역 등도 조성돼 있다.
북한산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북한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묘역을 가르키는 표지판도 잘 돼 있다. 야외 운동시설인 백운체육회 바로 앞에 있는 곳이 동암 서상일(1887~1962) 선생의 묘이다. 대구 출신으로 1909년 국권회복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과 1910년 광복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 제헌국회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대동청년당으로 활동할 때 그는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비겁하다"며 "청년이 비겁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을 남겼다.
서상일(徐相一 1887~1962) 동암(東庵) 서상일(徐相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48년 초대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6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62년에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