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각순-살수대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설명) |
(→설명) |
||
19번째 줄: | 19번째 줄: | ||
한편 백마를 타고 있는 [[을지문덕]]은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그림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백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 그림에서 백마의 경우도 [[을지문덕]]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한편 백마를 타고 있는 [[을지문덕]]은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그림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백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 그림에서 백마의 경우도 [[을지문덕]]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 | |||
− | |||
− | |||
=='''시각적 안내'''== | =='''시각적 안내'''== |
2017년 3월 20일 (월) 14:29 판
살수대첩 | |
작가 | 박각순 |
---|---|
제작연도 | 1975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국회사무처 |
설명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가 살수(薩水 : 지금의 청천강)에서 수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장면을 묘사한 민족기록화이다. 백마를 타고 고구려 갑옷을 입고 있는 오른편의 장수가 바로 을지문덕이다.
당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있던 수나라는 요서(遼西) 방면으로 진출을 노리던 고구려와 직접적으로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에 수나라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번 침공을 감행하였다.
살수대첩은 612년의 두 번째 침공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나라는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 5천명의 별동대를 편성해 평양성을 공략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고구려군은 게릴라 전술로 대응하였고, 수나라 군대는 이에 대응하면서 평양성 3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으나 지휘부의 불화, 물자 부족 등의 문제로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간파한 고구려 주장(主將)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수나라 군대의 퇴각을 유도하여 살수에서 배후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를 공격한 수나라 군대 30만 5천여명 중 겨우 2,700명 가량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압도적인 승전(勝戰)이었다.
한편 백마를 타고 있는 을지문덕은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그림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백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 이 그림에서 백마의 경우도 을지문덕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각적 안내
- 그림 위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되는 지점을 찾아 보세요.
- 온라인 이미지맵 에디터
관련 민족기록화
고구려 전쟁 소재 작품
관련항목
A항목 | B항목 | 관계 |
---|---|---|
박각순-살수대첩 | 박각순 |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
박각순-살수대첩 | 국회사무처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박각순-살수대첩 | 을지문덕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박각순-살수대첩 | 살수대첩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박각순-살수대첩 | 살수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박각순-살수대첩 | 제작연도 | 1975년 |
박각순-살수대첩 | 국회사무처 대여기간 | 1991.01.08~1992.01.07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박각순-살수대첩 | 소장처 | 국회사무처 | 37.532103 | 126.914133 |
그래프
참고문헌
- "살수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 (2017년 3월 20일 확인)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