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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한성시대부터 88서울올림픽 개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송파구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토대로 축제를 구현함으로써 구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계적인 축제로 도약 | 백제한성시대부터 88서울올림픽 개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송파구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토대로 축제를 구현함으로써 구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계적인 축제로 도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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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조왕]](溫祚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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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의 시조 (재위 BC 18∼AD 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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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사망 ? ~ 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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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로 [[비류]](沸流)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난을 피해 북부여(北扶餘)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을 때 졸본부여의 왕이 그에게 둘째딸을 시집보내 비류와 온조 형제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越郡)의 여자에게서 형제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 형제가 북부여 해부루(解扶婁) 왕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졸본 사람 연타취발(延陁溴勃)의 딸인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의 건국설화도 있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는데,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자신의 소생처럼 대우했다는 것이다.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백제의 제2대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 등을 낳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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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졸본으로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왕은 형인 비류와 함께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弥鄒忽)에 따로 터를 잡았다가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위례로 합류했다. 그 뒤 온조왕은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고,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하고 동명왕(東明王)의 묘당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성씨를 ‘해(解)’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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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조왕]]은 동쪽의 낙랑(樂浪), 북쪽의 말갈(靺鞨)과 대립하며 백제의 영토를 꾸준히 넓혀갔다. 기원전 17년(온조왕 2) 족부(族父)인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아 군사를 맡겼고, 기원전 16년에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해오자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출정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기원전 15년에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기원전 11년 백제가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세운 일로 우호관계가 끊어졌다. 이 해에 말갈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포위했으나 온조왕은 성을 굳건히 지키다가 퇴각하는 말갈군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9년에도 말갈족이 북쪽 국경을 쳐들어오자 왕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봉현(烽峴)으로 출정해 그들을 물리쳤다. 기원전 8년(온조왕 11)에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 파괴하자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세워 낙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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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6년 왕의 어머니가 죽자 온조왕은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워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워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성과 대궐을 세워 이듬해인 기원전 5년(온조왕 14) 도읍을 옮겼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지금의 광주(廣州)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백제의 영토는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였으며, 서쪽은 바다,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닿았다. 도읍을 옮긴 뒤에 온조왕은 부락(部落)을 돌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아 한성(漢城)의 주민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기원전 4년(온조왕 15) 한성에 새 궁궐을 지었고, 기원전 2년(온조왕 17)에는 왕의 어머니를 기리는 묘당을 세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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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2년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불태우면서 낙랑, 말갈과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기원전 1년(온조왕 18) 겨울에도 말갈이 쳐들어왔으나 온조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그들과 싸워 추장인 소모(素牟)를 붙잡아 마한(馬韓)으로 보냈다. 그리고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기 위해 구곡(臼谷)으로 갔으나 큰 눈을 만나 회군하였다. 기원후 4년(온조왕 22)에는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을 쌓았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말갈군을 물리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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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듯 나라가 커지고 강해지자 온조왕은 진한(辰韓)과 마한 병합을 추진했다. 기원후 6년에는 웅천(熊川)에 목책을 세웠으나 마한 왕의 항의를 받고 허물었다. 그러나 기원후 8년 사냥 가는 것으로 위장하고는 마한을 기습해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곳을 제외한 영토를 병합했다. 기원전 9년에는 원산성과 금현성도 점령해 그곳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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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한을 병합한 온조왕은 기원후 10년 맏아들인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아 그에게 군사를 맡겼다. 그리고 통치체계를 정비해 13년에는 나라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를 설치했으며, 15년에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를 더 설치했다. 16년 옛 마한의 장수인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온조왕은 직접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18년에는 탕정성(湯井城)을 쌓아 대두성(大豆城)의 주민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그리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새로 쌓았다. 19년 가뭄으로 한강 유역에 큰 흉년이 들자 이듬해 봄에 온조왕은 직접 동쪽의 주양(走壤)과 북쪽의 패하(浿河)까지 순행하였고, 각지에 사신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부역을 모두 중단케 했다. 22년 말갈이 술천성(述川城)과 부현성(釜峴城)을 공격해오자 왕은 병사를 보내 이를 막게 했다. 23년 우보인 을음이 죽자 부여 출신의 해루(解婁)를 새로 우보로 삼았다. 그리고 이 해에 한수 동북 지방의 15세 이상 장정을 징발해 위례성을 수리했다. 25년에는 남옥저(南沃沮) 구파해(仇頗解) 등이 귀순해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살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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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조왕]]은 기원후 28년(온조왕 46) 봄에 사망했고, 맏아들인 다루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
2022년 9월 14일 (수) 20:15 판
백제한성시대부터 88서울올림픽 개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송파구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토대로 축제를 구현함으로써 구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세계적인 축제로 도약
온조왕(溫祚王)
백제의 시조 (재위 BC 18∼AD 28).
출생-사망 ? ~ 28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로 비류(沸流)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난을 피해 북부여(北扶餘)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왔을 때 졸본부여의 왕이 그에게 둘째딸을 시집보내 비류와 온조 형제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越郡)의 여자에게서 형제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 형제가 북부여 해부루(解扶婁) 왕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졸본 사람 연타취발(延陁溴勃)의 딸인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의 건국설화도 있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는데,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자신의 소생처럼 대우했다는 것이다.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백제의 제2대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 등을 낳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졸본으로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왕은 형인 비류와 함께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弥鄒忽)에 따로 터를 잡았다가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위례로 합류했다. 그 뒤 온조왕은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고,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하고 동명왕(東明王)의 묘당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성씨를 ‘해(解)’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은 동쪽의 낙랑(樂浪), 북쪽의 말갈(靺鞨)과 대립하며 백제의 영토를 꾸준히 넓혀갔다. 기원전 17년(온조왕 2) 족부(族父)인 을음(乙音)을 우보(右輔)로 삼아 군사를 맡겼고, 기원전 16년에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해오자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출정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기원전 15년에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으나, 기원전 11년 백제가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세운 일로 우호관계가 끊어졌다. 이 해에 말갈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포위했으나 온조왕은 성을 굳건히 지키다가 퇴각하는 말갈군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9년에도 말갈족이 북쪽 국경을 쳐들어오자 왕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봉현(烽峴)으로 출정해 그들을 물리쳤다. 기원전 8년(온조왕 11)에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 파괴하자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세워 낙랑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기원전 6년 왕의 어머니가 죽자 온조왕은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워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워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성과 대궐을 세워 이듬해인 기원전 5년(온조왕 14) 도읍을 옮겼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지금의 광주(廣州)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백제의 영토는 북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경계였으며, 서쪽은 바다,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닿았다. 도읍을 옮긴 뒤에 온조왕은 부락(部落)을 돌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한강(漢江) 서북쪽에 성을 쌓아 한성(漢城)의 주민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기원전 4년(온조왕 15) 한성에 새 궁궐을 지었고, 기원전 2년(온조왕 17)에는 왕의 어머니를 기리는 묘당을 세웠다.
기원전 2년 낙랑이 쳐들어와 위례성을 불태우면서 낙랑, 말갈과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기원전 1년(온조왕 18) 겨울에도 말갈이 쳐들어왔으나 온조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그들과 싸워 추장인 소모(素牟)를 붙잡아 마한(馬韓)으로 보냈다. 그리고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기 위해 구곡(臼谷)으로 갔으나 큰 눈을 만나 회군하였다. 기원후 4년(온조왕 22)에는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을 쌓았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말갈군을 물리쳤다.
이렇듯 나라가 커지고 강해지자 온조왕은 진한(辰韓)과 마한 병합을 추진했다. 기원후 6년에는 웅천(熊川)에 목책을 세웠으나 마한 왕의 항의를 받고 허물었다. 그러나 기원후 8년 사냥 가는 것으로 위장하고는 마한을 기습해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곳을 제외한 영토를 병합했다. 기원전 9년에는 원산성과 금현성도 점령해 그곳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마한을 병합한 온조왕은 기원후 10년 맏아들인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아 그에게 군사를 맡겼다. 그리고 통치체계를 정비해 13년에는 나라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를 설치했으며, 15년에는 동부(東部)와 서부(西部)를 더 설치했다. 16년 옛 마한의 장수인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온조왕은 직접 5천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18년에는 탕정성(湯井城)을 쌓아 대두성(大豆城)의 주민을 나누어 이주시켰다. 그리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새로 쌓았다. 19년 가뭄으로 한강 유역에 큰 흉년이 들자 이듬해 봄에 온조왕은 직접 동쪽의 주양(走壤)과 북쪽의 패하(浿河)까지 순행하였고, 각지에 사신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부역을 모두 중단케 했다. 22년 말갈이 술천성(述川城)과 부현성(釜峴城)을 공격해오자 왕은 병사를 보내 이를 막게 했다. 23년 우보인 을음이 죽자 부여 출신의 해루(解婁)를 새로 우보로 삼았다. 그리고 이 해에 한수 동북 지방의 15세 이상 장정을 징발해 위례성을 수리했다. 25년에는 남옥저(南沃沮) 구파해(仇頗解) 등이 귀순해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살게 했다.
온조왕은 기원후 28년(온조왕 46) 봄에 사망했고, 맏아들인 다루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왕릉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