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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삼은(三隱)은 [[이색|목은 이색(牧隱 李穡)]], [[정몽주|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길재|야은 길재(冶隱 吉再)]]를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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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삼은(三隱)은 [[이색|목은 이색(牧隱 李穡)]], [[정몽주|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길재|야은 길재(冶隱 吉再)]]를 일컬어 왔다.  
  
하지만 근년에는 [[길재]] 대신 [[이숭인|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고려 말에 [[이숭인]]은 문장(文章), 경술(經術)로 [[이색]]·[[정몽주]]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당시 태학(太學)에서 경학(經學)을 강론해 대성황을 이룬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ref>박천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752 삼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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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자에는 [[길재]] 대신 [[이숭인|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고려 말에 [[이숭인]]은 문장(文章), 경술(經術)로 [[이색]]·[[정몽주]]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당시 태학(太學)에서 경학(經學)을 강론해 대성황을 이룬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ref>박천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752 삼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반면에 [[길재]]는 연령은 말할 것도 없고, 벼슬이나 도학(道學)에서도 위의 세 명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삼은에 걸맞지 않다라는 설이 있다. 우선 그들의 생존연대를 보면 [[이색]]은 1328년에 나서 1396년에 죽었고, [[정몽주]]는 1337년에 나서 1392년에 죽었으며, [[이숭인]]은 1347년에 나서 1392년에 죽었는데, 이에 비해 [[길재]]는 1353년에 나서 1419년에 죽었으니 이들보다 연령도 낮다. 그리고 위의 세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모두 제 명대로 살지 못한데에 비해, [[길재]]만은 은둔하여 천수(天壽)를 누렸기 때문이다.<ref>이재춘, "[http://www.nongsimga.pe.kr/newboard/read.cgi?board=story&y_number=34 삼은의 조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상에 얽힌 이야기』<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4년 07월 0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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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길재]]는 연령은 말할 것도 없고, 벼슬이나 도학(道學)에서도 위의 세 명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삼은에 걸맞지 않다라는 주장이 있다. 우선 그들의 생존연대를 보면 [[이색]](1328~1396년)과 [[정몽주]](1337~1392년), [[이숭인]](1347~1392년)에 비해, [[길재]]는 1353년에 나서 1419년에 죽어서 이들보다 연령도 낮았다. 그리고 위의 세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모두 제 명대로 살지 못한 데 비해, [[길재]]만은 비록 은둔하여 살았을지언정 천수(天壽)를 누렸기 때문이다.<ref>이재춘, "[http://www.nongsimga.pe.kr/newboard/read.cgi?board=story&y_number=34 삼은의 조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상에 얽힌 이야기』<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4년 07월 02일.</ref>
  
또 다른 학설은 [[길재]]를 포함시켜 [[이색]]·[[정몽주]]·[[길재]]를 삼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들이 삼은으로 불린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것으로 보아 수백 년 동안 관습적으로 구전되어 온 듯하다. [[길재]]에 대해서는 고려 말의 한 유자(儒者)이지만, 고려 말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하였다. [[길재]]는 [[이색]]·[[정몽주]]·[[권근|권근(權近)]]을 본받아 유학(儒學)을 이은 인물이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사학의 대연원을 일으킨 업적이 컸는데, 후세에서 그의 절의와 교육의 공적을 높이 산 결과, [[길재]]·[[정몽주]]와 더불어 흔히 '삼은'이라 불렀다는 것이다.<ref>박천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752 삼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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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학설은 [[길재]]를 포함시켜 [[이색]]·[[정몽주]]·[[길재]]를 삼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들이 삼은으로 불린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것으로 보아 수백 년 동안 관습적으로 구전되어 온 듯하다. [[길재]]고려 말의 한 유자(儒者)이지만, 고려 말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한다. [[길재]]는 [[이색]]·[[정몽주]]·[[권근|권근(權近)]]을 본받아 유학(儒學)을 이은 인물이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유학의 기원으로 학문을 일으킨 업적이 컸는데, 후세에서 그의 절의와 교육의 공적을 높이 사서 [[길재]]·[[정몽주]]와 더불어 흔히 '삼은'이라 불렀다는 것이다.<ref>박천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752 삼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러한 문제는 무엇이 정설이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아직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다 통용되고 있다.<ref>박천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752 삼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러한 문제는 무엇이 정설이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아직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다 통용되고 있다.<ref>박천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752 삼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018년 1월 2일 (화) 20:24 판

삼은
(三隱)
대표명칭 삼은
한자표기 三隱
관련개념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이숭인(李崇仁)



정의

고려의 세 충신을 아울러 부르는 총칭이다.

내용

흔히 삼은(三隱)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를 일컬어 왔다.

하지만 근자에는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고려 말에 이숭인은 문장(文章), 경술(經術)로 이색·정몽주와 함께 이름을 날렸고, 당시 태학(太學)에서 경학(經學)을 강론해 대성황을 이룬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1]

반면에 길재는 연령은 말할 것도 없고, 벼슬이나 도학(道學)에서도 위의 세 명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삼은에 걸맞지 않다라는 주장이 있다. 우선 그들의 생존연대를 보면 이색(1328~1396년)과 정몽주(1337~1392년), 이숭인(1347~1392년)에 비해, 길재는 1353년에 나서 1419년에 죽어서 이들보다 연령도 낮았다. 그리고 위의 세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모두 제 명대로 살지 못한 데 비해, 길재만은 비록 은둔하여 살았을지언정 천수(天壽)를 누렸기 때문이다.[2]

또 다른 학설은 길재를 포함시켜 이색·정몽주·길재를 삼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들이 삼은으로 불린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그것으로 보아 수백 년 동안 관습적으로 구전되어 온 듯하다. 길재는 고려 말의 한 유자(儒者)이지만, 고려 말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한다. 길재이색·정몽주·권근(權近)을 본받아 유학(儒學)을 이은 인물이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유학의 기원으로 학문을 일으킨 업적이 컸는데, 후세에서 그의 절의와 교육의 공적을 높이 사서 길재·정몽주와 더불어 흔히 '삼은'이라 불렀다는 것이다.[3]

이러한 문제는 무엇이 정설이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아직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다 통용되고 있다.[4]

지식관계망

  • 이색과 정몽주와 이숭인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삼은 이색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은 정몽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은 길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은 이숭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주석

  1. 박천규, "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재춘, "삼은의 조건", 『조상에 얽힌 이야기』online, 작성일: 2014년 07월 02일.
  3. 박천규, "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박천규, "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박천규, "삼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거리

  • 이재춘, "삼은의 조건", 『조상에 얽힌 이야기』online, 작성일: 2014년 07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