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패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정의) |
(→김성일과 칼) |
||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 |||
25번째 줄: | 25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유학자의 칼=== | ===유학자의 칼=== | ||
− | + | 장도(粧刀)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한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고 하여 낭도(囊刀), 허리춤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패도(佩刀)라고도 불렀다. <ref>박종군,「韓國刀劒에 關한 硏究 : 粧刀를 中心으로」,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5-7쪽.</ref> 여성들이 장식용, 호신용으로 들고 다닌 '은장도'도 이름에 있듯이 '장도'의 한 종류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장도를 찬 것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는 유학자들에게 칼은 '의리'와 '절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또 본인의 철학이나 좌우명 등을 칼에 새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글귀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자기 수양의 의미였다. 학봉 [[김성일]]의 패도에도 '釖曾當百萬帥(작은 칼로도 백만의 군사를 대적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
+ | |||
===김성일과 칼=== | ===김성일과 칼=== | ||
− | [[김성일]]의 [[학봉 행장 언해]] | + | [[김성일]]의 [[학봉 행장 언해]]에 [[김성일]]이 자녀들에게 검을 나누어 주면서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주는 뜻을 알겠는가. 모름지기 이 검으로 의(義)와 리(利)의 빗장을 깨뜨려서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공부를 하다 본심을 잃고 욕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의(義)와 리(利)를 엄격히 구별하고 의(義)를 취하라 말한 것이다. 또 [[김성일]]은 『[[학봉일고]]』에 실린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m002&gunchaId=hv001&muncheId=01&finId=301 연릉(延陵)의 칼]」에서 검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악한 자들을 징계할 수 있는 의리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학봉일고]]』에 있는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m002&gunchaId=hv001&muncheId=01&finId=306 풍성(蘴城)의 칼]」에서도 검은 간사한 자를 베어 충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 의리에서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수단으로 묘사한다. 『[[학봉집]]』에 수록된 「[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m002&gunchaId=av001&muncheId=01&finId=040 칼의 노래]」에서는 '칼의 노래'를 부르는 삶이 험난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의(義)를 실현해나가는 삶이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학봉 김성일에게 검은 '의(義)'의 상징이자 의(義)와 리(利)를 구별해주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항상 몸가까이 두어 경계로 삼아야 하는 것이었다.<ref>민희주, 「鶴峯 金誠一과 谿谷 張維의 劍소재 詩稿」,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24-30쪽.</ref> |
<!-- | <!-- | ||
===남명 조식의 경의검=== | ===남명 조식의 경의검=== |
2017년 11월 24일 (금) 22:39 기준 최신판
학봉 패도 (鶴峰 佩刀) |
|
대표명칭 | 학봉 패도 |
---|---|
한자표기 | 鶴峰 佩刀 |
시대 | 16세기 후반 |
소장처 | 의성김씨 학봉종택 |
수량 | 1개 |
관련인물 | 김성일 |
관련단체 | 의성 김씨 |
관련유물유적 | 의성김씨 학봉종택 학봉 행장 언해 |
정의
학봉 김성일이 차고 다니던 칼이다.
내용
유학자의 칼
장도(粧刀)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한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고 하여 낭도(囊刀), 허리춤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패도(佩刀)라고도 불렀다. [1] 여성들이 장식용, 호신용으로 들고 다닌 '은장도'도 이름에 있듯이 '장도'의 한 종류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장도를 찬 것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는 유학자들에게 칼은 '의리'와 '절개'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또 본인의 철학이나 좌우명 등을 칼에 새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글귀의 뜻을 항상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에게 경고하는, 자기 수양의 의미였다. 학봉 김성일의 패도에도 '釖曾當百萬帥(작은 칼로도 백만의 군사를 대적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김성일과 칼
김성일의 학봉 행장 언해에 김성일이 자녀들에게 검을 나누어 주면서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주는 뜻을 알겠는가. 모름지기 이 검으로 의(義)와 리(利)의 빗장을 깨뜨려서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공부를 하다 본심을 잃고 욕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의(義)와 리(利)를 엄격히 구별하고 의(義)를 취하라 말한 것이다. 또 김성일은 『학봉일고』에 실린 「연릉(延陵)의 칼」에서 검을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악한 자들을 징계할 수 있는 의리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학봉일고』에 있는 「풍성(蘴城)의 칼」에서도 검은 간사한 자를 베어 충성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 의리에서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수단으로 묘사한다. 『학봉집』에 수록된 「칼의 노래」에서는 '칼의 노래'를 부르는 삶이 험난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의(義)를 실현해나가는 삶이 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학봉 김성일에게 검은 '의(義)'의 상징이자 의(義)와 리(利)를 구별해주는 기준이 되는 것으로 항상 몸가까이 두어 경계로 삼아야 하는 것이었다.[2]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대부의 삶 |
지식 관계망
- 학봉 김성일가의 한글 고문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성일 | 학봉 패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학봉 패도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학봉 패도 | 검(패도)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조식 | 검(패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연릉의 칼 | 검(패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풍성의 칼 | 검(패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칼의 노래 | 검(패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연릉의 칼 | 김성일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풍성의 칼 | 김성일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칼의 노래 | 김성일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학봉 행장 언해 | 검(패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세기 후반 | 김성일이 학봉 패도를 사용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학봉 패도가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문화유산채널 : 선비의 칼 낙죽장도(게시일: 2015.11.09.)
- YTN 뉴스 : 국보급 '조선 선비의 칼' 첫 발견(게시일: 201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