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부교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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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부교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뒤로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불렸다 한다. 926년([[고려 태조|태조]] 9)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주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어가던 중 942년([[고려 태조|태조]] 25)에는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쳐왔다.<ref>이익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7609 만북교 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고려 태조]]는 '거란은 구맹(舊盟)을 돌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쳐 멸한 무도한 나라이므로 결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신 30명은 섬으로 | + | 만부교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뒤로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불렸다 한다. 926년([[고려 태조|고려 태조]] 9)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주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어가던 중 942년([[고려 태조|태조]] 25)에는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쳐왔다.<ref>이익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7609 만북교 사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고려 태조]]는 '거란은 구맹(舊盟)을 돌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쳐 멸한 무도한 나라이므로 결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어놓고 굶어죽게 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523&cid=42957&categoryId=42957 만부교 사건]",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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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로 인해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으며 이후에도 고려에서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태조는 이듬해 지어진 「훈요10조」에서도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고려 태조가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한 분노와 함께 태조의 북진정책의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도 보인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8523&cid=42957&categoryId=42957 만부교 사건]", 한국고중세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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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3:40 기준 최신판
만부교 사건(萬夫橋 事件) | |
대표명칭 | 만부교 사건 |
---|---|
한자표기 | 萬夫橋 事件 |
유형 | 사건 |
시대 | 고려시대 |
날짜 | 942년 |
관련인물 | 고려 태조 |
정의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필을 굶겨 죽인 사건이다.
내용
만부교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뒤로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불렸다 한다. 926년(고려 태조 9)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주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어가던 중 942년(태조 25)에는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쳐왔다.[1] 그러나 고려 태조는 '거란은 구맹(舊盟)을 돌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쳐 멸한 무도한 나라이므로 결연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어놓고 굶어죽게 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2]
이로 인해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으며 이후에도 고려에서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태조는 이듬해 지어진 「훈요10조」에서도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고려 태조가 이와 같이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사실에 대한 분노와 함께 태조의 북진정책의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도 보인다.[3]
지식관계망
- 고려 태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만부교 사건 | 고려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이익주, "만북교 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만부교 사건",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만부교 사건", 한국고중세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