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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통제사|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ref>김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725&cid=59015&categoryId=59015 이순신]",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수군통제사|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ref>김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725&cid=59015&categoryId=59015 이순신]",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명량해전|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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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900 이순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900 이순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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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3일 (목) 22:14 기준 최신판

이순신(李舜臣)
"이순신",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대표명칭 이순신
한자표기 李舜臣
생몰년 1545년(인종 1)-1598년(선조 31)
본관 덕수(德水)
시호 충무(忠武)
여해(汝諧)
출생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
사망지 노량
시대 조선
대표저서 『난중일기』,『이충무공전서』
대표직함 동구비보권관, 건원보권관, 사복시주부, 정읍현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이정(李貞)
초계 변씨(草溪卞氏) 변수림(卞守琳)의 딸
성격 장군
유형 인물



정의

조선시대의 무신

내용

출생과 유년시기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李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1]

관직생활

1572년(선조 5) 훈련원(訓鍊院)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탈락하였다. 그래서 30세가 넘은 1576년(선조 9)에야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와 함경도의 동구비보(董仇非堡) 권관(權管), 발포수군(鉢浦水軍) 만호(萬戶) 등을 거쳐 건원보(乾原堡) 권관, 훈련원(訓鍊院) 참군(參軍)을 지냈다.[2]

1583년(선조 16)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6년(선조 19)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로 다시 관직에 나서, 곧바로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을 관리하다가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 당시 이순신의 병력 증원 요청을 병사 이일(李鎰)이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었으나, 이순신은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杖刑)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다.[3]

1589년(선조 22) 이산해(李山海)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 조방장(助防將)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4]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순신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5]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6]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7]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 사베에|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8]

이순신은 1593년 8월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으며, 9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3일(음력 3월 4일) 당항포에서 왜선 30여척을 격침시켰고(제2차 당항포해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과 합세해 거제도 장문포(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장문포해전).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호남지역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돌보고, 전쟁의 장기화할 것에 대비해 둔전(屯田)을 일구고 병사들을 조련하였다.[9]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10]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11]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순신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시조 및 한시와 『난중일기(亂中日記)』 등을 남겼다. 그의 유품 가운데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들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명나라 신종이 그에게 준 8종 15개의 유물들인 통영의 ‘충렬사팔사품(忠烈祠八賜品)’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되어 통영 충렬사(忠烈祠,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麗水忠愍祠,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顯忠祠, 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1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순신 류성룡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이순신 수군절도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수군통제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임진왜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원균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옥포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이억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고니시 유키니가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한산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김응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가토 기요마사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정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노량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권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이항복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명량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진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이문욱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난중일기 이순신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이순신 통영 충렬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이순신 여수 충민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이순신 아산 현충사 A는 B에 제향되었다 A ekc:isEnshrinedIn B
이충무공전서 이순신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creator B
이순신 조선 선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순신 표준영정 이순신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해남명량대첩비 이순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100원권 동전 이순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해동명장전 이순신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순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이순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이순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이순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0. 김범, "이순신",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1.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이순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3. "이순신",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순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범, "이순신",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 거리

  1. 단행본
    • 김대현, 『이충무공전서 이야기 정조 이순신을 역사에 새기다』, 한국고전번역원, 2015.
    • 이순신(저)/노승석(역), 『교감완역 난중일기』, 여해, 2016.
  2. 논문
    • 김강녕,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리더십의 특성」, 『군사발전연구』 10권 2호, 2016, 29-71쪽.
    • 김봉렬, 「이순신의 백의종군 시기 행적에 관한 고찰」, 『인문논총』 25,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5-55쪽.
    • 김영환, 「이순신의 해전과 호남인의 애국정신」, 『정치정보연구』 7권 2호, 2004, 208-245쪽.
    • 김현기, 「이순신 제독의 전략 · 전술과 손자병법」, 『이순신연구논총』 4권 1호, 2005, 277-325호.
    • 신윤호, 「임진왜란 중 이순신일가의 동태와 이순신의 효의」, 『이순신연구논총』 8권 1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7, 185-220쪽.
    • 정진술,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연구 - 수원부에서 평택현까지」, 『충무공 이순신과 한국 해양』 1,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2014, 181-209쪽.
    • 황병성, 「정유재란기 이순신의 전략과 의병막하인물」, 『역사학연구』 46, 호남사학회, 2012, 67-91쪽.
    • 황유복, 「중국에서의 이순신장군 관련 사료와 연구」, 『이순신연구논총』 4권 1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5, 125-137쪽.
    • 김영숙, 『충무공 이순신 연구』, 경희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 정혜영, 『이순신의 리더십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7.
    • 이경식, 『충무공 이순신의 전승에 관한 연구 - 전리(戰理)에 의한 분석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 최두환, 『충무공 이순신의 리더십에 관한 연구 - 난중일기에 나타난 리더십 사례를 중심으로』, 경남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3. 웹 자원
    • 이장희, "이순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범, "이순신",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