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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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한 병산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 이하응 |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3,02600000,37 안동 병산서원]",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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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 + | 이 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시대부터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류성룡]]이 157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1614년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안치하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였다. 1863년에는 [[조선 철종|철종]]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3,02600000,37 안동 병산서원]",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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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서원 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복례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복례문을 들어서서 바라보면 소실점 효과로 인한 원근감이 여실히 느껴진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주목 받는 건물은 만대루로, 상상을 뛰어넘는 넓이에 낙동강을 건너 병풍처럼 서 있는 병산과 마주하게 된다. 한국의 건축학과 학생들이 답사 1번지로 꼽을 만큼 한국 전통 건축의 모든 요소가 집대성된 걸작이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KS_01_02_01&VdkVgwKey=13,02600000,37 안동 병산서원]",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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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4일 (목) 17:11 기준 최신판
안동 병산서원 (安東 屛山書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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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안동 병산서원 |
---|---|
한자표기 | 安東 屛山書院 |
유형 | 유적건조물 |
시대 | 조선 |
지정번호 | 사적 제260호 |
지정일 | 1978.03.31 |
관련인물 | 류성룡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위치한 조선 중기 서원이다.
내용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한 병산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1]
건립
이 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시대부터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류성룡이 157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1614년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안치하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추가로 봉안하였다. 1863년에는 철종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2]
구조
서원 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복례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복례문을 들어서서 바라보면 소실점 효과로 인한 원근감이 여실히 느껴진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주목 받는 건물은 만대루로, 상상을 뛰어넘는 넓이에 낙동강을 건너 병풍처럼 서 있는 병산과 마주하게 된다. 한국의 건축학과 학생들이 답사 1번지로 꼽을 만큼 한국 전통 건축의 모든 요소가 집대성된 걸작이다.[3]
병호시비
한편 1620년 안동 임하에 호계서원을 건립하여 이황을 제향하였는데 이 때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 류성룡의 위패 배치 문제를 두고 큰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 병산서원은 안동을 비롯한 영남 류성룡 계열 유림 모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김성일 계열 학자들은 호계서원을 중심지로 두었으므로 이들을 병파(屛派)와 호파(虎派)로 명명하였으며 이 때 벌어진 논란 또한 병호시비라 이름하게 되었다.[4]
지식 관계망
- 류성룡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류성룡 | 안동 병산서원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안동 병산서원 | 병호시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안동 호계서원 | 병호시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성일 | 안동 호계서원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이황 | 안동 호계서원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주석
- ↑ "안동 병산서원",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 - ↑ "안동 병산서원",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 - ↑ "안동 병산서원",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 - ↑ 이근호, "병호시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설석규, 「퇴계학파(退溪學派)의 분화(分化)와 병호시비(屛虎是非)(2) : 려강(호계)서원(廬江(虎溪)書院) 치폐(置廢) 전말(顚末) 」,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5,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009.
유용한 정보
- "퇴계 선생의 제자 서열, 400년만에 정리됐다", 『영남일보』, 작성일:2013년 05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