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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5일 (월) 01:18 기준 최신판
흥왕사의 변(興王寺─變) | |
대표명칭 | 흥왕사의 변 |
---|---|
한자표기 | 興王寺─變 |
시대 | 고려시대 |
날짜 | 1363년 |
관련인물 | 고려 공민왕, 김용(金鏞) |
관련장소 | 개성 흥왕사(開城 興王寺) |
정의
1363년 김용(金鏞)이 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이다.
내용
1359, 1361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신했고, 1362년 전란이 평정된 뒤 환도하여 1363년 2월에 개성 흥왕사(開城 興王寺)를 거처로 삼았다.[1]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공적(功績)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김용(金鏞)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鄭世雲)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복주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行宮)에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했다. 이강달(李剛達)의 기지로 공민왕은 겨우 변을 면했으나, 용모가 비슷한 안도치(安都赤)가 대신 죽고 말았다. 이 변란은 최영(崔瑩) 등이 군사를 이끌고 흥왕사에 와서 그들을 토벌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2]
사건이 끝난 직후, 처음에 김용은 반란군 진압에 나서는 등으로 위장하여 위기를 모면했으나, 곧 그의 음모가 드러나 체포되었다. 이어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으로 귀양 갔다가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로 옮겨진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하였다.[3]
지식관계망
- 고려 공민왕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흥왕사의 변 | 개성 흥왕사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흥왕사의 변 | 김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흥왕사의 변 | 고려 공민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 - ↑ 민병하, "흥왕사의 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민병하, "흥왕사의 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왕뚜껑열려, "신돈에 나왓던 흥왕사의 변이 뭔가요?",
『Daum 팁』online .
- 민병하, "흥왕사의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