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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박태보]]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ref>박정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301 박태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박태보]]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ref>박정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301 박태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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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성혼(成渾)]]과 [[이이|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박태보]]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 + |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성혼(成渾)]]과 [[이이|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박태보]]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이로 인해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정재집|정재집(定齋集)]]』 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f>박정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301 박태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8년 1월 11일 (목) 22:47 기준 최신판
박태보(朴泰輔) | |
대표명칭 | 박태보 |
---|---|
한자표기 | 朴泰輔 |
생몰년 | 1654년-1689년 |
본관 | 반남(潘南) |
시호 | 문열(文烈) |
호 | 정재(定齋) |
자 | 사원(士元)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정재집 |
대표직함 | 예조좌랑 |
부 | 박세당 |
모 | 박세당 처 의령남씨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내용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박정(朴炡)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1]
생애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에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수찬·부교리(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묘 승출(陞黜: 위패를 새로이 모시거나 있던 위패를 출향시킴)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박태보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2]
활동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이어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다. 그런데 박태보가 부임해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가 이로 인해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해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정재집(定齋集)』 14권, 편서로는 『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박태보 | 박세당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박태유 | 박세당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박세당 처 의령남씨 | 박태보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박세당 처 의령남씨 | 박태유 | A는 B의 어머니이다 | A ekc:hasSon B |
박세당 | 박세당 처 의령남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서인 | 박태보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서인 | 박태유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박세후 처 파평윤씨 | 윤선거 | A는 B의 딸이다 | A ekc:hasFather B |
박세후 | 박세후 처 파평윤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박태보 | 박세후 | A는 B의 양자이다 | A ekc:IsAdoptedHeirOf B |
기사환국 | 박태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기사환국 | 박태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재집 | 박태보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윤증 | 박태보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 박태보 | A는 B가 썼다 | A dcterms:creator B |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 박태보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박정자, "박태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정자, "박태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정자, "박태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주영아, 「박태보의 정치에 대한 기대와 지방관으로서의 태도 고찰」, 『동양문화연구』 11,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2, 133-160쪽.
- 최정묵,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儒學硏究』 17,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8, 119-139쪽.
- 웹자원
- 박정자, "박태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정자, "박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