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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18세기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 + | 17, 18세기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급증하였다. 특히 [[이앙법|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다. 다수의 [[영세농민]]들은 몰락한 후 [[영세빈농]]·[[전호|전호(佃戶)]]가 되었다.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농민들은 유민, 임노동자 계층과 [[부농]]·[[서민지주]] 계층으로 분화되었다. |
+ | 한편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전업화(專業化)]]가 이루어지고 [[사상인|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이 증가하고 평민·천민은 감소하였으며 몰락한 양반도 늘어나는 등 신분 계층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권위도 동요되었다. 특히, 17·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과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서 비롯된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상인]]과 [[지방 사상인]]의 대립도 심화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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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 + |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인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돈으로 향임을 산 [[납전승향|납전승향(納錢陞鄕 :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됨.)]] 계층이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관군의 반격과 [[홍경래]] 반란군의 최후==== | ====관군의 반격과 [[홍경래]] 반란군의 최후==== | ||
− | 관군의 추격을 받은 홍경래의 반란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 + | 관군의 추격을 받은 홍경래의 반란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관군이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파하면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홍경래]] 등 주모자와 남정(男丁) 1,917명은 모두 처형되었다.<ref>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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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 | + | **권내현,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한국인물사연구』, Vol.11, No.-,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401-425쪽. | |
− | **권내현,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 + | **박현모, 「홍경래난을 통해서 본 19세기 조선정치」, 『동양정치사상사』, Vol.4, No.2,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5, 131-148쪽. |
− | * | +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석종,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948 홍경래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분류:사건]] | [[분류: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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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23:54 기준 최신판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 |
대표명칭 | 홍경래의 난 |
---|---|
한자표기 | 洪景來─亂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11년 12월-1812년 4월 |
관련인물 | 홍경래, 우군칙 |
관련유물유적 | 유빈박씨애책문 |
목차
정의
1811년(조선 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이다.
내용
홍경래의 난의 사회경제적 배경
17, 18세기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급증하였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다. 다수의 영세농민들은 몰락한 후 영세빈농·전호(佃戶)가 되었다.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농민들은 유민, 임노동자 계층과 부농·서민지주 계층으로 분화되었다. 한편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專業化)가 이루어지고 사상인(私商人)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이 증가하고 평민·천민은 감소하였으며 몰락한 양반도 늘어나는 등 신분 계층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권위도 동요되었다. 특히, 17·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과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서 비롯된 삼정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상인과 지방 사상인의 대립도 심화되었다.[1]
홍경래의 난 일어나다
홍경래 반란군의 조직
홍경래의 난은 10여 년 전분터 준비되었던 조직적 반란이었다. 홍경래·우군칙·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 등으로 대표되는 몰락양반·유랑지식인들은 『정감록(鄭鑑錄)』 등으로 변혁에 대한 이념을 제공하였다. 여기에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부호, 요호(饒戶)·부민(富民) 등 부농·서민지주층과 사상인층의 물력(物力) 및 조직력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대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李禧著)의 집이 있는 다복동(多福洞)을 거점으로 삼고, 각지의 부호·부상대고(富商大賈)들과 연계를 맺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노동자·빈농·유민 등을 급가고용(給價雇用)해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2]
홍경래의 군대 거침없이 진격하다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각지의 내응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내응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風憲) 등 향임(鄕任)과 별장(別將)·천총·파총·별무사(別武士) 등 무임(武任) 중인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돈으로 향임을 산 납전승향(納錢陞鄕 :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됨.) 계층이었다.[3]
관군의 반격과 홍경래 반란군의 최후
관군의 추격을 받은 홍경래의 반란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4]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京軍)·향군(鄕軍)·민병(民兵)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관군이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파하면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홍경래 등 주모자와 남정(男丁) 1,917명은 모두 처형되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홍경래 | 홍경래의 난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몰락양반 | 홍경래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몰락양반 | 우군칙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몰락양반 | 김사용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몰락양반 | 김창시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몰락양반 | 홍경래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부호 | 홍경래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빈농 | 홍경래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유민 | 홍경래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광산노동자 | 홍경래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상인층 | 홍경래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홍경래의 난 | 안동 김씨 | A는 B와 관련이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홍경래의 난 | 정주성 | A는 B와 관련이있다 | A edm:isRelatedTo B |
홍경래의 난 | 유빈박씨애책문 | A는 B와 관련이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11년 12월-1812년 4월 | 홍경래가 주도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9.695185 | 125.2142 | 홍경래의 난은 정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권내현, 「'홍경래 난' 연구의 쟁점」, 『한국인물사연구』, Vol.11, No.-, 한국인물사연구소, 2009, 401-425쪽.
- 박현모, 「홍경래난을 통해서 본 19세기 조선정치」, 『동양정치사상사』, Vol.4, No.2,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5, 131-148쪽.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정석종, "홍경래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석종, "홍경래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