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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조선 중기 문신인 학봉(鶴峰) [[김성일]]의 종택(宗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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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봉종택의 | + | ===학봉종택의 가치와 의의=== |
− | 학봉종택은 400년이 넘는 종택의 역사에 걸맞게 학계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되어 오고 있다. [[금계마을]]의 [[의성김씨]] 입향조(入鄕祖)<ref>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 김택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830 입향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709&cid=46636&categoryId=46636 입향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f>인 학봉을 비롯하여 [[김흥락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같은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저술한 각종 사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제사나 민속 같은 전통생활양식까지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7쪽.</ref> | + | 학봉종택은 400년이 넘는 종택의 역사에 걸맞게 학계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되어 오고 있다. [[금계마을]]의 [[의성김씨]] 입향조(入鄕祖)<ref>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 김택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830 입향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709&cid=46636&categoryId=46636 입향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f>인 학봉을 비롯하여 [[김흥락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같은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저술한 각종 사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제사나 민속 같은 전통생활양식까지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7쪽.</ref> |
− | === | + | ===금계마을 입향 배경=== |
− | [[금계마을]]은 『[[영가지 |영가지(永嘉誌)]]』에서 옛적부터 '천년이 지나도록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할 만큼 길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금계마을]]에 입향한 문중은 [[흥해배씨]], [[경주이씨]], [[안동권씨]], [[원주변씨]], [[안동장씨]], [[의성김씨]] 등으로, 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입향하였다. 이 시기의 결혼습속에 | + | [[금계마을]]은 『[[영가지 |영가지(永嘉誌)]]』에서 옛적부터 '천년이 지나도록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할 만큼 길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금계마을]]에 입향한 문중은 [[흥해배씨]], [[경주이씨]], [[안동권씨]], [[원주변씨]], [[안동장씨]], [[의성김씨]] 등으로, 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입향하였다. 이 시기의 결혼습속에 결혼 후 남자는 처가에 거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봉은 [[김진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넷째 아들로 처가가 있는 [[금계마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6세기 말 이후로는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상속제가 일반화되면서 의성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금계마을]]의 중심 문중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금계마을]]에 남아있는 종택들은 주로 금계의 본류 주위에 터전을 잡았는데, [[의성김씨]]는 상류의 [[안동장씨]]와 하류의 [[원주변씨]] 사이에 주로 위치하며, 학봉종택이 공간적으로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8-9쪽.</ref> |
− | ===학봉의 금계 | + | ===학봉의 짧은 금계 생활=== |
− | 『[[학봉집]]』 연보에 의하면, 김성일은 1582년 부친의 3년상을 치르고 | + | 『[[학봉집]]』 연보에 의하면, 김성일은 1582년 부친의 3년상을 치르고 안동의 서쪽 금계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이거는 공의 나이 45세 때 일로서 이때 비로소 김성일이 처가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거 이후 곧 [[의정부 사예]]로 환조하고 이듬해에는 [[나주목사]]로 제수를 받아 지방에 머물렀기 때문에 실제 금계에서 생활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1586년 12월 나주목사에서 해임된 후 1588년 7월 조정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금계에 머물며 여러 일에 관여하고 유람도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맞이하였고, 결국 1593년 진주 공관에서 전쟁중에 병사하였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9-10쪽.</ref> |
===학봉종택의 건립 정황=== | ===학봉종택의 건립 정황=== | ||
− | 학봉종택은 그의 손자인 [[김시추 |김시추(金是樞, 1580-1640)]] 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음을 『[[금계지 |금계지(金溪志)]]』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시추 |경력공(김시추)]]이 당시 [[감여승]]이었던 [[성지 |성지(性智)]] | + | 학봉종택은 그의 손자인 [[김시추 |김시추(金是樞, 1580-1640)]] 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음을 『[[금계지 |금계지(金溪志)]]』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김시추 |경력공(김시추)]]이 당시 풍수지리를 보던 [[감여승]]이었던 [[성지 |성지(性智)]]에게 길지를 정하도록 하였으며,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건물을 앉힌 후 '풍뢰헌(風雷軒)'과 '영모재(永慕齋)'라는 당호를 달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종택의 터를 잡았던 곳이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곳이라고 전해질 뿐 당시 종택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0쪽.</ref> |
===두 번의 종택 이건=== | ===두 번의 종택 이건=== | ||
− | 학봉종택은 | + | 학봉종택은 손자 [[김시추]]가 창건한 이후 두 번 이건하였다. 『[[금계지|금계지(金溪誌)]]』에 따르면. 여기에서 9대손인 현감공 [[김종수]]가 소복산(召福山) 아래로 종택의 터를 옮기고 건물을 남동향인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복산 아래의 종택 터는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으로 당시의 사랑채(현 [[소계서당]])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기록으로는 정확한 이건 시기를 알 수 없는데, 10대손 [[김진화]]가 이건한 종택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건 시기는 [[김종수]]가 태어난 1761년에서 [[김진화]]가 태어난 179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후 [[김진화]]가 말년에 원주에서 돌아와 종택을 더 넓히고, 이건을 하였다고 한다. 증축과 이건 시기는 1842년~1846년 사이로 판단된다. 종택을 이건하고 비어있던 현 종택의 위치에 1934년에 소계서당을 건립하였으며, 1964년에는 원래 종택이 있었던 현 위치로 종택을 재이건하였다. 이때 현 학봉종택의 안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새 종택의 사랑채 부재로 다시 사용하고, 당시 사랑채 건물은 이건하지 않고 [[소계서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1964년의 재이건 당시 건물의 배치는 현재와는 달리 사당과 'ㅁ'자형 본채, 부엌 옆 '一'자형 부속채만 있었다고 한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0-12쪽.</ref> |
===종택 이건의 동기=== | ===종택 이건의 동기=== | ||
− | 약 400여 년 동안 두 차례의 이건과 재이건이 이루어졌는데, 이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중에서는 18세기 말의 이건이 잦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었다고 | + | 약 400여 년 동안 두 차례의 이건과 재이건이 이루어졌는데, 이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중에서는 18세기 말의 이건이 잦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었다고 하나 문헌으로 전하는 바는 없다. 그렇지만 이건과 재이건의 전 시기에 대가 끊기는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집안의 길흉을 집터의 [[풍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당시의 생활풍속이 작용했을 개연성도 있다.<ref>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2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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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1일 (월) 16:42 기준 최신판
의성김씨 학봉종택 (義城金氏 鶴峯宗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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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의성김씨 학봉종택 |
---|---|
한자표기 | 義城金氏 鶴峯宗宅 |
영문명칭 | Hakbong Head Residence of Gim Clan of Uiseong |
유형 | 주택(한옥) |
시대 | 17세기 초엽 |
지정번호 |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112호 |
지정일 | 1995년 12월 01일 |
관련유물유적 | - 고문서 56종 261점(보물 제905호) - 제초고 및 선조 전래의 전적문서(보물 제9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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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중기 문신인 학봉(鶴峰) 김성일의 종택(宗宅)이다.
내용
학봉종택의 가치와 의의
학봉종택은 400년이 넘는 종택의 역사에 걸맞게 학계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연구되어 오고 있다. 금계마을의 의성김씨 입향조(入鄕祖)[1]인 학봉을 비롯하여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같은 출중한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저술한 각종 사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제사나 민속 같은 전통생활양식까지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2]
금계마을 입향 배경
금계마을은 『영가지(永嘉誌)』에서 옛적부터 '천년이 지나도록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할 만큼 길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금계마을에 입향한 문중은 흥해배씨, 경주이씨, 안동권씨, 원주변씨, 안동장씨, 의성김씨 등으로, 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에 입향하였다. 이 시기의 결혼습속에 결혼 후 남자는 처가에 거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봉은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넷째 아들로 처가가 있는 금계마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6세기 말 이후로는 적장자(嫡長子) 중심의 상속제가 일반화되면서 의성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금계마을의 중심 문중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금계마을에 남아있는 종택들은 주로 금계의 본류 주위에 터전을 잡았는데, 의성김씨는 상류의 안동장씨와 하류의 원주변씨 사이에 주로 위치하며, 학봉종택이 공간적으로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3]
학봉의 짧은 금계 생활
『학봉집』 연보에 의하면, 김성일은 1582년 부친의 3년상을 치르고 안동의 서쪽 금계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이거는 공의 나이 45세 때 일로서 이때 비로소 김성일이 처가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거 이후 곧 의정부 사예로 환조하고 이듬해에는 나주목사로 제수를 받아 지방에 머물렀기 때문에 실제 금계에서 생활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1586년 12월 나주목사에서 해임된 후 1588년 7월 조정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금계에 머물며 여러 일에 관여하고 유람도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맞이하였고, 결국 1593년 진주 공관에서 전쟁중에 병사하였다.[4]
학봉종택의 건립 정황
학봉종택은 그의 손자인 김시추(金是樞, 1580-1640) 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음을 『금계지(金溪志)』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경력공(김시추)이 당시 풍수지리를 보던 감여승이었던 성지(性智)에게 길지를 정하도록 하였으며,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건물을 앉힌 후 '풍뢰헌(風雷軒)'과 '영모재(永慕齋)'라는 당호를 달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종택의 터를 잡았던 곳이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곳이라고 전해질 뿐 당시 종택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5]
두 번의 종택 이건
학봉종택은 손자 김시추가 창건한 이후 두 번 이건하였다. 『금계지(金溪誌)』에 따르면. 여기에서 9대손인 현감공 김종수가 소복산(召福山) 아래로 종택의 터를 옮기고 건물을 남동향인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소복산 아래의 종택 터는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으로 당시의 사랑채(현 소계서당)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기록으로는 정확한 이건 시기를 알 수 없는데, 10대손 김진화가 이건한 종택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이건 시기는 김종수가 태어난 1761년에서 김진화가 태어난 179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이후 김진화가 말년에 원주에서 돌아와 종택을 더 넓히고, 이건을 하였다고 한다. 증축과 이건 시기는 1842년~1846년 사이로 판단된다. 종택을 이건하고 비어있던 현 종택의 위치에 1934년에 소계서당을 건립하였으며, 1964년에는 원래 종택이 있었던 현 위치로 종택을 재이건하였다. 이때 현 학봉종택의 안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새 종택의 사랑채 부재로 다시 사용하고, 당시 사랑채 건물은 이건하지 않고 소계서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1964년의 재이건 당시 건물의 배치는 현재와는 달리 사당과 'ㅁ'자형 본채, 부엌 옆 '一'자형 부속채만 있었다고 한다.[6]
종택 이건의 동기
약 400여 년 동안 두 차례의 이건과 재이건이 이루어졌는데, 이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중에서는 18세기 말의 이건이 잦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었다고 하나 문헌으로 전하는 바는 없다. 그렇지만 이건과 재이건의 전 시기에 대가 끊기는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집안의 길흉을 집터의 풍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당시의 생활풍속이 작용했을 개연성도 있다.[7]
지식 관계망
- 학봉 김성일가의 한글 고문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성일 |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 A ekc:isNamesakeOf B |
김성일 | 이황 | A는 B의 제자이다 | A ekc:hasMaster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금계마을 | A는 B에 위치한다 | A dcterms:isPartOf B |
김흥락 | 김성일 | A는 B의 후손이다 | A ekc:hasAncestor B |
영가지 | 금계마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김성일 | 금계마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진 | 김성일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집 | 김성일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김시추 | 김집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시추 |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금계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종수 | A는 B에 의해 이건되었다 | A ekc:renovator B |
김진화 | 김종수 | A는 아버지 B가 있다 | A ekc:hasFather B |
풍뢰헌 | 김진화 | A는 B에 의해 이건되었다 | A ekc:renovator B |
의성김씨 학봉종택 | 김시인 | A는 B에 의해 이건되었다 | A ekc:renovator B |
학봉 행장 언해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여자초학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김주국의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582년 | 김성일이 금계마을에 입향하였다. |
17세기 초엽 | 김시추가 의성김씨 학봉종택을 건립하였다. |
1761년-1793년 사이 | 김종수가 의성김씨 학봉종택을 이건하였다. |
1842년-1846년 사이 | 김진화가 '풍뢰헌'을 이건하였다. |
1964년 | 김시인이 의성김씨 학봉종택을 이건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금계마을)에 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의성김씨 학봉 종택(게시일: 2012.10.10.)
- YTN 뉴스 : 전통예법으로 뿌리 지키는 종갓집(게시일: 2015.02.19.)
주석
- ↑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이나 조상. 김택규, "입향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입향조",『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7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8-9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9-10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0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0-12쪽.
-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1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유기원, 김기주, 「학봉종택 소장 家圖의 분석을 통한 18세기 종택의 이건계획 및 건축적 특성」, 『건축역사연구』 제18권 3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09.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김덕현, 『안동 선비마을, 열두 검제』(한국학중앙연구원, 2016)
- 김영조,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얼레빗, 2015)
- 윤천근, 『안동의 종가』(지식산업사, 2001)
- 이연자, 『천년의 전통과 맥을 이어가는 명문 종가 이야기』(컬처라인, 2004)
- 이해영, 『의리와 충절의 400년, 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예문서원, 2011)
- 한국학중앙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한국간찰자료선집 12 : 안동 금계 의성김씨 학봉(김성일)종택편』(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논문
- 함금자, 「종가박물관의 역할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정책·산업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 연구보고서
- 『지방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 경상북도, 1994.
-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