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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 *사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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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보문헌비고』 | ** 『증보문헌비고』 | ||
** 『홍문관지(弘文館志)』 | ** 『홍문관지(弘文館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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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논문 |
− | ** 남지대, 「朝鮮初期의 經筵制度 : 世宗, 文宗年間을 중심으로」, | + | ** 남지대, 「朝鮮初期의 經筵制度 : 世宗, 文宗年間을 중심으로」, 『韓國史論』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0, 117-170쪽. |
− | ** 권연웅, 「조선전기 경연(經筵)의 재이론」, | + | ** 권연웅, 「조선전기 경연(經筵)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13, 역사교육학회, 1990, 597-61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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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 ===더 읽을 거리=== | ||
*논문 | *논문 | ||
− | ** 신동은, 「조선 전기 경연(經筵)의 이념과 전개 : 태조 ~ 중종 연간을 중심으로」, | + | --> |
− | ** 오항녕,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 + | ** 신동은, 「조선 전기 경연(經筵)의 이념과 전개 : 태조 ~ 중종 연간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 | ** 김영주, 「조선조 경연제도 연구」, | + | ** 오항녕,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사상연구』28, (사)율곡연구원, 2014. |
+ | ** 김영주, 「조선조 경연제도 연구」, 『언론학연구』18, 부산울산경남언론학회, 2014. | ||
− | * | + | *웹자원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165&cid=40942&categoryId=31723 경연(經筵)]",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165&cid=40942&categoryId=31723 경연(經筵)]",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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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 21:36 기준 최신판
경연 (經筵) |
|
대표명칭 | 경연 |
---|---|
한자표기 | 經筵 |
이칭 | 경악(經幄), 경유(經帷) |
유형 | 교육제도 |
목차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일을 이른다.[1]
내용
실질적 기능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왕권의 행사를 사적인 규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2]
기원 - 중국
기원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나라 때는 한림원에 시강학사(侍講學士)와 시독학사(侍讀學士)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관직이 더욱 정비되고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원·명·청 나라 때에는 경연 강의가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3]
고려시대 경연
우리나라는 고려 때 예종이 경연을 처음 도입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무신집권 때는 경연이 폐지되었다. 원나라의 지배 아래에서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경연이 부진했던 원인은 대체로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던 데 있다.
조선시대 경연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했고, 정종과 태종도 각각 경연을 실시하였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으며, 집현전을 정비해 경연관을 강화하였다. 특히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 여러 정치 문제를 협의하기도 함으로써 경연이 바야흐로 정치의 심장부가 되기도 하였다. 경연은 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기도 했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다.
경연관
경연관의 직제는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 성종 말년에는 특진관을 두었는데, 1·2품의 대신 중에서 임명했으며, 정원은 없었다. 낭청으로는 시강관·시독관·검토관이 있었는데 모두 홍문관원이 겸임하였다. 시강관은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가 겸했고, 시독은 교리·부교리가 겸했으며, 검토관은 수찬·부수찬이 겸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연 | 분류두공부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 | 예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 | 유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 | 왕권 견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 | 서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 | 경연청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청 | 홍문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청 | 예문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연 | 갑오경장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권연웅, "경연(經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논문
- 남지대, 「朝鮮初期의 經筵制度 : 世宗, 文宗年間을 중심으로」, 『韓國史論』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80, 117-170쪽.
- 권연웅, 「조선전기 경연(經筵)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13, 역사교육학회, 1990, 597-616쪽.
- 신동은, 「조선 전기 경연(經筵)의 이념과 전개 : 태조 ~ 중종 연간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오항녕, 「문치주의와 대칭적 경세론에서 본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사상연구』28, (사)율곡연구원, 2014.
- 김영주, 「조선조 경연제도 연구」, 『언론학연구』18, 부산울산경남언론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