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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 + |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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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 + |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조선 고종 3)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그리고 [[이현익|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이에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박규수]]의 화공 작전을 피하다가 | + | 이에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박규수]]의 화공 작전을 피하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미국 정부는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에 분노하여 군사적 조치를 취하였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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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에 의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전말을 미국 영사 [[샌포드]]가 알게 되었다.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 영사 [[조지 시워드|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 *1866년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에 의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전말을 미국 영사 [[샌포드]]가 알게 되었다.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 영사 [[조지 시워드|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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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정부는 [[로저스|로저스(Rodgers, J.)]]에게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이끌고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 + | 미국 정부는 [[로저스|로저스(Rodgers, J.)]]에게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이끌고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면서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 + | 다음 날인 6월 11일에는 [[덕진진|덕진진(德津鎭)]]을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잇었으나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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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ref>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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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ref>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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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 + | *논문 |
− |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 + | **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93, No.-, 부산경남사학회, 2014, 31-64쪽. |
− | *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3, No.1, 한국정책과학학회, 1999, 17-26쪽. |
− | *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 *웹사이트 내 특정 페이지 | ||
+ | **김민수,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0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 | **김원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961 신미양요]",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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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1일 (금) 20:32 기준 최신판
신미양요(辛未洋擾) | |
대표명칭 | 신미양요 |
---|---|
한자표기 | 辛未洋擾 |
유형 | 사건 |
시대 | 조선시대 |
날짜 | 1871년 |
관련인물 | 흥선대원군 이하응 |
관련장소 | 강화도 |
관련유물유적 | 척화비 |
목차
정의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이다.
내용
신미양요가 일어난 배경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조선 고종 3)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 제너럴 셔먼호는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그리고 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제너럴 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1]
이에 평양 주민들은 제너럴 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박규수의 화공 작전을 피하다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조선 군민들의 공격에 제너럴 셔먼호 선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들은 미국 정부는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에 분노하여 군사적 조치를 취하였다.[2]
신미양요의 발발과 경과
미국 정부는 로저스(Rodgers, J.)에게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이끌고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면서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3]
다음 날인 6월 11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점거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잇었으나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4]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
• 어제 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
지식 관계망
- 윤음을 통해 보는 조선 임금들의 애민정신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신미양요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미양요 | 박규수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미양요 | 흥선대원군 이하응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미양요 | 천주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흥선대원군 이하응 | 쇄국양이정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미양요 | 어제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척사윤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천주학 | 천주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66년 7월-8월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다 |
1871년 6월 1일 | 미군 함대와 강화포대와 충돌이 벌어져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나다 |
1871년 6월 10일 | 미국 함대가 초지진을 점령하다 |
1871년 6월 11일 |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점령하다 |
1871년 | 신미양요가 일어나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632555 | 126.532528 | 미국 함대가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
37.66496 | 126.530074 |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민수, "신미양요",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원모, "신미양요",
『한국민족문화대배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논문
- 신효승,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공과 전황 분석」, 『역사와 경계』, Vol.93, No.-, 부산경남사학회, 2014, 31-64쪽.
- 심기재, 「明治 4(1871)年, 辛未洋擾와 明治政策의 대응」, 『한국정책과학학회보』, Vol.3, No.1, 한국정책과학학회, 1999, 17-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