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5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21번째 줄: | 21번째 줄: | ||
|승탑비= | |승탑비= | ||
}} | }} | ||
+ | |||
=='''정의'''== | =='''정의'''== | ||
고려 중기의 승려. | 고려 중기의 승려. | ||
31번째 줄: | 32번째 줄: | ||
1159년 [[산청 단속사|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국사(國師)로 추증(追贈)되었고, 1172년(명종 2) [[산청 단속사|단속사]]에 비가 건립되었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785 탄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159년 [[산청 단속사|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국사(國師)로 추증(追贈)되었고, 1172년(명종 2) [[산청 단속사|단속사]]에 비가 건립되었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785 탄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 ===저서 및 작품=== |
+ | 탄연은 시문과 경서에 뛰어났으며 고려 제일의 서예가라 불렸다. 서풍은 [[왕희지]], [[구양순]]을 따랐다.<ref>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참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8795&cid=42636&categoryId=42636 탄연]", 미술대사전(인명편),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작품으로는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춘천 청평사]]의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예천의 복룡사비(北龍寺碑), 삼각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등이 있다. | ||
===신품사현=== | ===신품사현=== | ||
− | [[이규보]]는 신라의 [[김생|김생(金生)]], 고려의 | + | [[이규보]]는 신라의 [[김생|김생(金生)]], 고려의 탄연, [[최우|최우(崔瑀)]], [[유신|유신(柳伸)]]의 글씨를 신품(神品)이라고 평하며, 이들 네 사람을 '신품 4현(神品四賢)'이라고 불렀다. [[이규보]]는 [[행서|행서(行書)]]에 능했다고 알려진 탄연의 글씨에 대해서는 "환하기는 밝은 달이 구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찬란하기는 부용이 못에서 솟아난 것 같다. 연약하여 미부인과 같다고 이르지 말라. 밖은 곱지만 속은 근골이 박혀 있다. 한 점 한 획이 알맞게 조화되니. 인위로 된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것이다"라고 평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9302&cid=40942&categoryId=33071 신품사현]",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blockquote | {{blockquote | ||
|환하기는 명월(明月)이 구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찬란하기는 부용(芙蓉)이 못에서 솟아난 것 같다. 연약하여 미부인(美夫人)과 같다고 이르지 말라. 밖은 곱지만 속은 근골이 박혀있다. 한 점 한 획이 알맞게 조화되니. 인위로 된 것이 아니라 신(神)이 만든 것이다. | |환하기는 명월(明月)이 구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찬란하기는 부용(芙蓉)이 못에서 솟아난 것 같다. 연약하여 미부인(美夫人)과 같다고 이르지 말라. 밖은 곱지만 속은 근골이 박혀있다. 한 점 한 획이 알맞게 조화되니. 인위로 된 것이 아니라 신(神)이 만든 것이다. | ||
40번째 줄: | 42번째 줄: | ||
}} | }} | ||
− | ==''' | + | =='''지식 관계망'''== |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지식관계망''' | ||
+ | <html> | ||
+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
+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
+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D003/stele_woneung_unmunsa.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 | == | + | ===관계정보===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56번째 줄: | 64번째 줄: |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탄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탄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
|- | |- | ||
− | | [[ | + | |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 [[탄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 | |- | ||
| [[탄연]] || [[왕사]]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 [[탄연]] || [[왕사]]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
|} | |} | ||
− | ==''' | + | =='''주석'''== |
<references/> | <references/> | ||
−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74번째 줄: | 81번째 줄: | ||
[[분류:인물]] | [[분류:인물]] | ||
[[분류:승려]] | [[분류:승려]] | ||
− | [[분류:승탑/ | + | [[분류:승탑/검토요청!]] |
2017년 11월 24일 (금) 17:48 기준 최신판
탄연(坦然) | |
대표명칭 | 탄연 |
---|---|
한자 | 坦然 |
생몰년 | 1070년(문종 24)-1159년(의종13) |
시호 | 대감국사(大鑑國師) |
호 | 묵암(默庵) |
성씨 | 손씨(孫氏)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
정의
고려 중기의 승려.
내용
1085년(선종 2)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변방의 저택에 있던 숙종의 초청으로 세자를 가르치다가, 1088년 궁중에서 몰래 나와 경북산 안적사(安寂寺)로 출가하였다.[1] 개성 광명사(廣明寺)의 혜소(慧炤, 생몰년 미상)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2]
1105년(숙종 10) 승과(僧科)에 급제, 1106년(예종 1)에 대사(大師), 1109년 중대사(重大師), 1115년 삼중대사(三重大師), 1121년 선사(禪師)에 올랐다. 1123년(인종 1) 첩수가사(帖繡袈裟)를 하사받고 1129년 보제사(普濟寺) 주지로서 법회를 열었다. 1132년 대선사(大禪師)로서 왕의 자문역이 되고 1146년 왕사(王師)가 되었다. 1147년 의종이 즉위한 후에는 예우가 더욱 극진하였으나 1148년 은퇴하고 단속사(斷俗寺)에 들어가 계속 선교(禪敎) 중흥에 이바지했다.[3]
1159년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국사(國師)로 추증(追贈)되었고, 1172년(명종 2) 단속사에 비가 건립되었다.[4]
저서 및 작품
탄연은 시문과 경서에 뛰어났으며 고려 제일의 서예가라 불렸다. 서풍은 왕희지, 구양순을 따랐다.[5] 작품으로는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淸道 雲門寺 圓鷹國師碑), 춘천 청평사의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 예천의 복룡사비(北龍寺碑), 삼각산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등이 있다.
신품사현
이규보는 신라의 김생(金生), 고려의 탄연, 최우(崔瑀), 유신(柳伸)의 글씨를 신품(神品)이라고 평하며, 이들 네 사람을 '신품 4현(神品四賢)'이라고 불렀다. 이규보는 행서(行書)에 능했다고 알려진 탄연의 글씨에 대해서는 "환하기는 밝은 달이 구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찬란하기는 부용이 못에서 솟아난 것 같다. 연약하여 미부인과 같다고 이르지 말라. 밖은 곱지만 속은 근골이 박혀 있다. 한 점 한 획이 알맞게 조화되니. 인위로 된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것이다"라고 평했다.[6]
환하기는 명월(明月)이 구름에서 벗어난 것 같고 찬란하기는 부용(芙蓉)이 못에서 솟아난 것 같다. 연약하여 미부인(美夫人)과 같다고 이르지 말라. 밖은 곱지만 속은 근골이 박혀있다. 한 점 한 획이 알맞게 조화되니. 인위로 된 것이 아니라 신(神)이 만든 것이다. | ||
출처: "동국 제현(東國諸賢)의 글씨를 평론한 데 대한 서", 동국이상국후집 제11권 서(序), |
지식 관계망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탄연 | 개성 광명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탄연 | 산청 단속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탄연 | 산청 단속사 |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신품사현 | 탄연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탄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 탄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A ekc:calligrapher B |
탄연 | 왕사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주석
- ↑ 박상국, "탄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탄연",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탄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박상국, "탄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참조:"탄연", 미술대사전(인명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신품사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 박상국, "탄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탄연",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탄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