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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일명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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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옥]]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으로 남접파의 거두이며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도하였다.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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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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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민란을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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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 입교하다===
1892년([[조선 고종|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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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아버지 [[전창혁|전창혁(全彰爀)]]은 고부 군수 [[조병갑|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437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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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조선 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437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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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민란]]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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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조선 고종|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였으며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br/>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1차 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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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이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인근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고부 백산(白山)에 8000여 명이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하였다. 이어 전주를 향하여 진격하여 [[황토현전투]](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 등지까지 장악한 뒤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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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의 악행은 또 다시 동학교도들의 격분을 샀다.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김기범(金箕範)]]·[[손화중|손화중(孫華中)]]·[[최경선|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倡儀文)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ref>김창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865 동학운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하고 [[톈진조약|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 군대도 입국하여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 응징, 노비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弊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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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1894년 4월부터 12월까지 [[1차 동학농민운동]][[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나, 부하였던 [[김경천|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ref>"부하였던...교수형을 당하였다." - 출처: "[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이후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하여 감시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2차 동학농민운동===
 
그러나 근본적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음에 따라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조선에 대한 침략행위를 노골화하는 일본의 행태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였다.<br/>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서 12만의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손병희(孫秉熙)]]의 10만 농민군과 연합하여 교주 [[최시형|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구국의 대일본전(對日本戰)을 시작하였다. 항쟁의 규모는 한때 중부·남부 전역을 비롯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남도까지 확대되었으나 근대적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정부군의 반격에 패배를 거듭하다가 공주(公州)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br/>
 
패색이 짙어지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 은신하여 동지 [[손화중|손화중(孫化仲)]]·[[김덕명|김덕명(金德明)]]·[[최경선|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부하였던 [[김경천|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17830 전봉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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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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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9일 (수) 09:23 기준 최신판

전봉준(全琫準)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전봉준
한자표기 全琫準
생몰년 1855년-1895년 4월 23일
본관 천안
이칭 녹두장군
해몽(海夢)
명좌(明佐)
시대 근대
국적 조선
대표직함 동학접주
전창혁(全彰爀)
유형 농민운동가


정의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로 일명 녹두장군이라 불렸다.

서장옥전봉준·김개남·손화중의 스승으로 남접파의 거두이며 최시형에게서 떨어져 남접을 창도하였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동학에 입교하다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아버지 전창혁(全彰爀)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고 한다.[1]
1890년(조선 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2]

고부민란 주도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군은 무기를 탈취하고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였으며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하도록 하였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3]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이용태의 악행은 또 다시 동학교도들의 격분을 샀다.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는 창의문(倡儀文)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 근방의 10여 읍에서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4]
전봉준은 1894년 4월부터 12월까지 1차 동학농민운동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하였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전봉준 전창혁 A는 아버지 B가 있다 A ekc:hasFather B
전봉준 동학 A는 B와 관련이 있다 edm:isRelatedTo B
동학 최시형 A는 B와 관련이 있다 edm:isRelatedTo B
최시형 전봉준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전봉준 김개남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전봉준 손화중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전봉준 최경선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전봉준 고부민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전봉준 동학농민운동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전봉준 정읍 전봉준 유적 A는 B에서 거주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94년 1월 전봉준고부민란에 참여하였다
1894년 4월 전봉준1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12월 전봉준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12월 30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1895년 4월 23일 전봉준이 처형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5.720230 126.806633 전봉준백산성에서 봉기하였다
35.671222 126.814583 전봉준정읍 전봉준 유적에 기거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
  2.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7년 04월 30일.
  3. "전봉준", 『doopedia』online, 두산백과.
  4. 김창수,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부하였던...교수형을 당하였다." - 출처: "전봉준", 『doopedia』online, 두산백과.
  6.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김창수,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봉준", 『doopedia』online, 두산백과.

더 읽을거리

  1. 단행본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