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지식 관계망) |
|||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16번째 줄: | 16번째 줄: | ||
}} | }} | ||
=='''정의'''== | =='''정의'''== | ||
− | 1898년 | + | 1898년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개최되었던 민중 집회이다. |
=='''내용'''== | =='''내용'''== |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 ||
− |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해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 + |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해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 및 정치활동을 하였다. 1898년 2월 이후 [[독립협회]]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광무(光武)정권은 자주외교와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또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친러정권을 통하여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소유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이러한 비자주적 외교에 강력히 반대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0002 만민공동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
===1차 만민공동회=== | ===1차 만민공동회=== | ||
− |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월, 12일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러시아인 탁지부(度支部 오늘날의 재무부에 해당)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 + |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월, 12일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인 탁지부(度支部 오늘날의 재무부에 해당)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였다. [[이승만]](李承晩)·[[홍정후]](洪正厚) 등의 청년 연사가 외친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의 여론을 끓게 하였다. 이 두 날의 공동회 집회 사건은 정부 관료와 서울 주재 외교관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고,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러시아는 절영도 대신 청국의 요동반도로 해군기지를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에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했으며 노한은행도 철폐하였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14&content_id=cp040700140001&search_left_menu= 1차 만민공동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2차 만민공동회=== | ===2차 만민공동회=== | ||
− | 그 해 10월, [[독립협회]]는 당시의 정치·외교·사회 제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대책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고, 국정개혁의 대원칙을 결정하였다. 당시의 회장직은 [[윤치호]](尹致昊)가 맡았으며,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서울시민은 물론 [[독립협회]]·[[국민협회]]·[[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 박정양(朴定陽) 등이 참석하였다.<br/> | + | 그 해 10월, [[독립협회]]는 당시의 정치·외교·사회 제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대책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고, 국정개혁의 대원칙을 결정하였다. 당시의 회장직은 [[윤치호]](尹致昊)가 맡았으며,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서울시민은 물론 [[독립협회]]·[[국민협회]]·[[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 [[박정양 | 박정양(朴定陽)]] 등이 참석하였다.<br/> |
공동회 둘째 날인 10월 29일 6개항의 개혁 원칙을 결의하고 이를 황제에게 헌의(獻議)하기로 하였다. | 공동회 둘째 날인 10월 29일 6개항의 개혁 원칙을 결의하고 이를 황제에게 헌의(獻議)하기로 하였다. | ||
{{Blockquote| 헌의6조 (獻議6條)<br/> | {{Blockquote| 헌의6조 (獻議6條)<br/> | ||
35번째 줄: | 35번째 줄: | ||
⑤칙임관(勅任官)을 임명할 때는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서 할 것<br/> | ⑤칙임관(勅任官)을 임명할 때는 황제가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서 할 것<br/> | ||
⑥별항(외국의 하원을 모방한 민회 설치 등)을 실천할 것<br/> | ⑥별항(외국의 하원을 모방한 민회 설치 등)을 실천할 것<br/> | ||
− | |출처="[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663&cid=42958&categoryId=42958 헌의6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 | + | |출처=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663&cid=42958&categoryId=42958 헌의6조]", 한국근현대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이 결의에 따라 고종은 [[헌의6조]]를 수정 없이 재가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약속하였다. | 이 결의에 따라 고종은 [[헌의6조]]를 수정 없이 재가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약속하였다. | ||
===3차 만민공동회=== | ===3차 만민공동회=== | ||
− | 그러나 정부관료 보수파 세력은 | + | 그러나 정부관료 보수파 세력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의회개설 운동을 통해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 정부는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며 충돌하였다.<br/> |
− | 1898년 12월 25일 고종 황제는 칙어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 + | 1898년 12월 25일 고종 황제는 칙어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11가지 죄목을 열거하고 "처음에는 가로되 충군한다, 가로되 애국한다 한 것이 일찍이 불선한 것이 아니로되, 끝에 가서는 가로되 패(悖)라 하고, 가로되 난(亂)이라 해도 그 이름을 도피할 바가 없으니 의구지심(疑懼之心)이 이로 말미암아 난 바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대한제국의 개혁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407&index_id=cp04070017&content_id=cp040700170001&search_left_menu= 3차 만민공동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
또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8년 말에 소멸되고 말았다. | 또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8년 말에 소멸되고 말았다.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
+ | * [http://dh.aks.ac.kr/Encyves/Graph/C050/C050.htm "만민공동회의 민중대회"(최대섭) 지식관계망] | ||
<html> | <html> |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
54번째 줄: | 55번째 줄: |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 | |- | ||
− |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A는 | + |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 |- | ||
| [[독립협회]] || [[서재필]]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 [[독립협회]] || [[서재필]]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
92번째 줄: | 93번째 줄: |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663&cid=42958&categoryId=42958 헌의6조]", 한국근현대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663&cid=42958&categoryId=42958 헌의6조]", 한국근현대사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 [[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분류:민족/ | + | [[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
+ | [[분류:민족/교열완료]] |
2017년 11월 21일 (화) 23:39 기준 최신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 |
대표명칭 | 만민공동회 |
---|---|
한자표기 | 萬民共同會 |
유형 | 민중운동 |
시대 | 근대 |
날짜 | 1898년 11월 5일-1898년 12월 23일 |
관련장소 | 서울시내 |
목차
정의
1898년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개최되었던 민중 집회이다.
내용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해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 및 정치활동을 하였다. 1898년 2월 이후 독립협회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광무(光武)정권은 자주외교와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또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친러정권을 통하여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소유하려 하자 독립협회는 이러한 비자주적 외교에 강력히 반대하였다.[1]
1차 만민공동회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월, 12일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인 탁지부(度支部 오늘날의 재무부에 해당)고문과 군부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였다. 이승만(李承晩)·홍정후(洪正厚) 등의 청년 연사가 외친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의 여론을 끓게 하였다. 이 두 날의 공동회 집회 사건은 정부 관료와 서울 주재 외교관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고,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러시아는 절영도 대신 청국의 요동반도로 해군기지를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에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했으며 노한은행도 철폐하였다.[2]
2차 만민공동회
그 해 10월, 독립협회는 당시의 정치·외교·사회 제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대책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고, 국정개혁의 대원칙을 결정하였다. 당시의 회장직은 윤치호(尹致昊)가 맡았으며,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대집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서울시민은 물론 독립협회·국민협회·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 박정양(朴定陽) 등이 참석하였다.
공동회 둘째 날인 10월 29일 6개항의 개혁 원칙을 결의하고 이를 황제에게 헌의(獻議)하기로 하였다.
헌의6조 (獻議6條) ①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관민이 합력하여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
||
출처: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온라인 참조: "헌의6조", 한국근현대사사전, |
이 결의에 따라 고종은 헌의6조를 수정 없이 재가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약속하였다.
3차 만민공동회
그러나 정부관료 보수파 세력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의회개설 운동을 통해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하였다. 정부는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하여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며 충돌하였다.
1898년 12월 25일 고종 황제는 칙어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11가지 죄목을 열거하고 "처음에는 가로되 충군한다, 가로되 애국한다 한 것이 일찍이 불선한 것이 아니로되, 끝에 가서는 가로되 패(悖)라 하고, 가로되 난(亂)이라 해도 그 이름을 도피할 바가 없으니 의구지심(疑懼之心)이 이로 말미암아 난 바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대한제국의 개혁을 위한 마지막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3]
또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898년 말에 소멸되고 말았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독립협회 | 서재필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만민공동회 | 1차 만민공동회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만민공동회 | 2차 만민공동회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만민공동회 | 관민공동회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만민공동회 | 3차 만민공동회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만민공동회 | 황국협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EBSLearning (EBS 초중고 교육), 5분사탐 한국근현대사, 독립협회, YouTube, 작성일: 2013년 04월 25일.
주석
- ↑ "만민공동회",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1차 만민공동회",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 "3차 만민공동회",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신용하, "만민공동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만민공동회",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1차 만민공동회",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2차 만민공동회",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3차 만민공동회",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한국사사전편찬회, 『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온라인 참조: "헌의6조", 한국근현대사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용하, "만민공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