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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함경도 북평사, 암행어사, 대사간 등을 지냈다. 1803년(순조 3) 대사간으로 있을 때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여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이조참의,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1818년(순조 18)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의금부사, 좌참찬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거듭 사직하다가 1823년(순조 23) 판중추부사로 전임된 다음 관직을 떠났다. 퇴임 직전에 서얼호통을 주장하여 서자도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세도정치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다. 청렴결백하고 소박하여 권세와 이익을 멀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626&cid=46622&categoryId=46622 임한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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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함경도 북평사, 암행어사, 대사간 등을 지냈다. 1803년(순조 3) 대사간으로 있을 때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여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이조참의,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1818년(순조 18)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의금부사, 좌참찬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거듭 사직하다가 1823년(순조 23) 판중추부사로 전임된 다음 관직을 떠났다. 퇴임 직전에 서얼허통을 주장하여 서자도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세도정치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다. 청렴결백하고 소박하여 권세와 이익을 멀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626&cid=46622&categoryId=46622 임한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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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626&cid=46622&categoryId=46622 임한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7626&cid=46622&categoryId=46622 임한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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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9일 (일) 18:38 기준 최신판

임한호(林漢浩)
대표명칭 임한호
한자표기 林漢浩
생몰년 1752년-1827년
본관 나주(羅州)
시호 정간(貞簡)
경소(景昭)
시대 조선
대표직함 우의정, 판의금부사, 좌참찬, 이조판서
배우자 이의관의 딸 이씨
승지 임상원
심위의 딸 심씨
자녀 부사 임현철, 임의철, 임기철
성격 인물
유형 백관



정의

조선 후기의 문관이다.

내용

우의정,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서얼허통을 주장했다. 『정조효의왕후건릉산릉도감의궤(상)』 총호사[1],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 총호사, 『효의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총호사[2]를 역임하였다.

관직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함경도 북평사, 암행어사, 대사간 등을 지냈다. 1803년(순조 3) 대사간으로 있을 때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여 안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이조참의,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1818년(순조 18)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의금부사, 좌참찬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나 거듭 사직하다가 1823년(순조 23) 판중추부사로 전임된 다음 관직을 떠났다. 퇴임 직전에 서얼허통을 주장하여 서자도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하여 세도정치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다. 청렴결백하고 소박하여 권세와 이익을 멀리하였다는 평을 받았다.[3]

사후

1832년(순조 32)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임한호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 A는 B의 담당자였다 A edm:isRelatedTo B
임상원 임한호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심위 임한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심씨 임한호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이의관 임한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한호 이씨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임한호 임현철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임한호 임의철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임한호 임기철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임한호 백관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21년 임한호는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를 담당하였다

주석

  1. "정조효의왕후건릉산릉도감의궤",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국립중앙박물관.
  2. "효의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online,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 "임한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한국계행보』

더 읽을거리

  • "임한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