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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 | + |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97%BC%EB%AC%B4 고염무]",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 작성일: 2017년 11월 04일</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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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명이학(宋明理學)의 형이상학적 지향성에 반대하여 생겨난 청나라 때의 대표적 | + | 송명이학(宋明理學)의 형이상학적 지향성에 반대하여 생겨난 청나라 때의 대표적 학풍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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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내용'''== | ||
===[[고증학]]의 등장배경=== | ===[[고증학]]의 등장배경=== | ||
− | + | 청나라 초기의 학자들은 [[양명학]]의 폐단과 명나라의 멸망에 자극되어 경세(經世)를 위하고 실사(實事)에 기초하는 학문을 펼치기를 원하였다.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심으로 하는 실학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학문적 배경이 되는 [[경학|경학(經學)]]과 [[사학|사학(史學)]]에서 송명이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배척하고, 한·당나라의 [[훈고학|훈고학(訓詁學)]]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경학]]과 [[사학]]에서의 실증적인 연구방법이 발전된 것을 청대의 [[고증학]] 이라고 한다. [[고증학]]의 주류는 [[경학]]을 중심으로 하여 저장(浙江)의 서쪽에서 일어난 이른바 절서학파(浙西學派)였으며, 그 시조는 [[고염무|고염무(顧炎武, 1613-1682년)]]이다.<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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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의 학문연구방법은 훗날 [[고증학]]의 연구방법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연구 방법은 귀창(貴創)·박증(博證)·치용(致用)의 세 가지이다. 귀창이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하여 깨달아 얻은 바가 있으면 문득 기록하였다가,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때때로 개정하고, 혹 옛 사람 중에 나보다 먼저 밝혀놓은 것이 있으면 이를 삭제한다."고 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다음으로 박증이란 어떤 일을 논할 때 반드시 널리 증거를 찾아 확인하는 과학적 연구방법인데, 이 박증의 정신이 바로 [[고증학]]에서 자주 나오는 연구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치용이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명나라 말의 [[첩괄파|첩괄파(帖括派)]], [[청담파|청담파(淸談派)]] 등의 공리공론을 일삼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현실과 관련된 학문을 함으로써, 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는 학문 태도이다.<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고증학]]의 창시자인 [[고염무]]의 학문연구방법은 훗날 [[고증학]]의 연구방법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연구 방법은 귀창(貴創)·박증(博證)·치용(致用)의 세 가지이다. 귀창이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하여 깨달아 얻은 바가 있으면 문득 기록하였다가,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때때로 개정하고, 혹 옛 사람 중에 나보다 먼저 밝혀놓은 것이 있으면 이를 삭제한다."고 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다음으로 박증이란 어떤 일을 논할 때 반드시 널리 증거를 찾아 확인하는 과학적 연구방법인데, 이 박증의 정신이 바로 [[고증학]]에서 자주 나오는 연구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치용이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명나라 말의 [[첩괄파|첩괄파(帖括派)]], [[청담파|청담파(淸談派)]] 등의 공리공론을 일삼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현실과 관련된 학문을 함으로써, 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는 학문 태도이다.<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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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학]]의 전개=== | ===[[고증학]]의 전개=== | ||
− | + | [[고염무]]에서 비롯된 [[절서학파]]는 [[호위|호위(胡渭)]], [[염약거|염약거(閻若璩)]]에 의하여 크게 발전했으며, 건륭가경시대(乾隆嘉慶時代, 1736-1820)에 이르러서는 [[혜동|혜동(惠棟)]], [[전대흔|전대흔(錢大昕)]]을 중심으로 한 [[오파|오파(吳派)]]와 [[대진|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왕염손(王念孫)]], [[왕인지|왕인지(王引之)]]를 중심으로 한 [[환파|환파(晥派)]]로 나누어지면서, [[고증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고증학]]은 [[유월|유월(兪樾)]], [[장병린|장병린(章炳麟)]], [[왕국유|왕국유(王國維)]] 등에 의하여 계승되지만, 청조의 쇠퇴와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때문에 몰락하게 된다.<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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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학]]이 한반도에 전래된 과정=== | ===[[고증학]]이 한반도에 전래된 과정=== | ||
− | + | 중국에서 [[고증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는 한국의 조선 후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건국 이래 지속되어왔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실학자들의 정치적 제도개혁을 주로 하는 저술과 농공상기예(農工商技藝)에 대한 저술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정치적 제도개혁과 저술 활동으로는 [[유형원|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반계수록(磻溪隨錄)]]』, [[정약용]]의 『[[경세유표|경세유표(經世遺表)]]』등이 있고 농공상기예에 대한 저술로는 이용후생파로 일컬어지는 [[박제가|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북학의(北學議)』]], [[박지원|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 있다. [[김정희]] 또한 [[고증학]]에 영향을 받았는데, 24세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교유하였다. <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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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하여 대성한 학자로는 [[김정희|김정희(金正喜)]]와 [[정약용]]을 대표로 들 수 있다. [[김정희]]는 24세 때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된 아버지 [[김노경|노경(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옹방강(翁方綱)]]과 [[완원|완원(阮元)]]을 만나게 되었고, 수차에 걸친 교유 끝에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고증학]] 학자들을 두루 만나 보았으며, 이런 경험은 [[김정희]]를 통한 조선의 여러 학자들에게 [[고증학]]이 전파되는데 큰 도움되었다.<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이런 학술적 기류 속에서 그들의 학문적 기반이 되는 [[유교경전]]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방법, 즉 주자학적 연구방법과 다른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니, 청조의 [[고증학]]은 각광을 받게 되었다. |
+ |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하여 대성한 학자로는 [[김정희|김정희(金正喜)]]와 [[정약용]]을 대표로 들 수 있다. [[김정희]]는 24세 때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된 아버지 [[김노경|노경(魯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옹방강(翁方綱)]]과 [[완원|완원(阮元)]]을 만나게 되었고, 수차에 걸친 교유 끝에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고증학]] 학자들을 두루 만나 보았으며, 이런 경험은 [[김정희]]를 통한 조선의 여러 학자들에게 [[고증학]]이 전파되는데 큰 도움되었다.<ref>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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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 한글팀 고증학 02 인물 완원.jpg| 청 중기 대표 | + | 파일: 한글팀 고증학 02 인물 완원.jpg| 청 중기 대표 고증학자 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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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 + | ===인용 및 참조=== |
− | + | *이기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957 고증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 | *진성수, 「명말(明末),청초 고증학(淸初 考證學)의 연원(淵源) 고찰(考察)-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를 중심으로」, 『東洋哲學硏究』72, 동양철학연구회, 2012. | |
− | + | *정신남, 「조선후기(朝鮮後期) 지식인(知識人)의 청대(淸代) 건가고증학(乾嘉考證學)에 대한 인식(認識) 연구(硏究)-한송논쟁(漢宋論爭)을 中心으로」, 『學林』36, 연세사학연구회, 2015, 225-259쪽. | |
− | + | *이원석, 「양주학파(揚州學派) 완원(阮元)의 천산학(天算學)과 서학관(西學觀)-"실학적(實學的) 통학(通學)"과 관련하여」, 『中國史硏究』93, 중국사학회, 2014, 229-355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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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2일 (수) 23:18 기준 최신판
고증학 (考證學) |
|
대표명칭 | 고증학 |
---|---|
한자표기 | 考證學 |
유형 | 개념/용어 |
관련개념 | 주자학, 양명학 |
목차
정의
송명이학(宋明理學)의 형이상학적 지향성에 반대하여 생겨난 청나라 때의 대표적 학풍을 말한다.
내용
고증학의 등장배경
청나라 초기의 학자들은 양명학의 폐단과 명나라의 멸망에 자극되어 경세(經世)를 위하고 실사(實事)에 기초하는 학문을 펼치기를 원하였다.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심으로 하는 실학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 학문적 배경이 되는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서 송명이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배척하고, 한·당나라의 훈고학(訓詁學)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경학과 사학에서의 실증적인 연구방법이 발전된 것을 청대의 고증학 이라고 한다. 고증학의 주류는 경학을 중심으로 하여 저장(浙江)의 서쪽에서 일어난 이른바 절서학파(浙西學派)였으며, 그 시조는 고염무(顧炎武, 1613-1682년)이다.[1]
고증학의 전개
고염무에서 비롯된 절서학파는 호위(胡渭), 염약거(閻若璩)에 의하여 크게 발전했으며, 건륭가경시대(乾隆嘉慶時代, 1736-1820)에 이르러서는 혜동(惠棟), 전대흔(錢大昕)을 중심으로 한 오파(吳派)와 대진(戴震), 단옥재(段玉裁),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를 중심으로 한 환파(晥派)로 나누어지면서, 고증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고증학은 유월(兪樾), 장병린(章炳麟), 왕국유(王國維) 등에 의하여 계승되지만, 청조의 쇠퇴와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때문에 몰락하게 된다.[2]
고증학이 한반도에 전래된 과정
중국에서 고증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는 한국의 조선 후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건국 이래 지속되어왔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실학자들의 정치적 제도개혁을 주로 하는 저술과 농공상기예(農工商技藝)에 대한 저술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정치적 제도개혁과 저술 활동으로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등이 있고 농공상기예에 대한 저술로는 이용후생파로 일컬어지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 있다. 김정희 또한 고증학에 영향을 받았는데, 24세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교유하였다. [3]
지식 관계망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증학 | 고염무 | A는 B에 의해 창시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양명학 | 왕수인 | A는 B에 의해 창시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양명학 | 고증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고증학 | 훈고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반계수록 | 유형원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경세유표 | 정약용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북악의 | 박제가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열하일기 | 박지원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유형원 | 고증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약용 | 고증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박제가 | 고증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박지원 | 고증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김정희 | 김노경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김정희 | 옹방강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정희 | 완원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이기동, "고증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기동, "고증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기동, "고증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이기동, 고증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진성수, 「명말(明末),청초 고증학(淸初 考證學)의 연원(淵源) 고찰(考察)-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를 중심으로」, 『東洋哲學硏究』72, 동양철학연구회, 2012.
- 정신남, 「조선후기(朝鮮後期) 지식인(知識人)의 청대(淸代) 건가고증학(乾嘉考證學)에 대한 인식(認識) 연구(硏究)-한송논쟁(漢宋論爭)을 中心으로」, 『學林』36, 연세사학연구회, 2015, 225-259쪽.
- 이원석, 「양주학파(揚州學派) 완원(阮元)의 천산학(天算學)과 서학관(西學觀)-"실학적(實學的) 통학(通學)"과 관련하여」, 『中國史硏究』93, 중국사학회, 2014, 229-3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