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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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학봉(鶴峰) [[김성일|김성일(金誠一)]]이 1592년(조선 선조 25) 12월 말에 아내 [[안동권씨]]에게 쓴 편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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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우도감사로 부임하여 임지(任地)인 [[진주]]로 이동하는 중에 경남 [[산음]]현(현 산청)에 잠시 머무르던 학봉 [[김성일]](1538-1593) | + | 경상우도감사로 부임하여 임지(任地)인 [[진주]]로 이동하는 중에 경남 [[산음]]현(현 산청)에 잠시 머무르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안동]] 본가에서 장모를 모시고 있는 아내 [[안동권씨]](1538-1623)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끝에 발신일을 '서달 스믈나한날'로 적었고 발신자 표시에는 '김'이라 했으며, 봉투에는 '內簡'과 '右監司宅 안동납실'이라고 적은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는 학봉 [[김성일]]의 편지 가운데 유일한 한글편지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아내에 대한 애틋함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학, 국문학, 국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산음]]에 와서 잠시 머무르고 있는 자신의 안부를 간단히 전한다. 새해를 앞두고 보내는 편지인 만큼 장모를 모시고 새해를 잘 맞이하라고 당부하면서도 감사가 되었어도 음식을 아무것도 보내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다. 자신과 떨어져 있을 아내가 염려되었는지 편지 말미에는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있으라고 하였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70쪽.</REF> |
===김성일과 임진왜란=== | ===김성일과 임진왜란=== | ||
− | [[김성일]]이 아내에게 편지를 쓴 1592년은 | + | [[김성일]]이 아내에게 편지를 쓴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였다. 그가 편지를 쓴 배경을 파악하려면 당시 조선의 시대 상황과 김성일의 행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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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전투 | * 마산 전투 | ||
− | + | 김성일은 1590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후 1591년 보고서에서 왜적이 침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2년 3월, 경상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이 일을 문제 삼아 김성일을 파직하였다. 이에 유성룡등이 간청하여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 招諭使)로 발령받게 되었다.<ref>김명준, 「임진년 진주대첩과 학봉 김성일」, 『경남문화연구소보』 제 30호, 2009.</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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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유사(招諭使) 활동 | * 초유사(招諭使) 활동 | ||
− | 김성일은 충청도 직산에서 초유사 | + | 김성일은 충청도 직산에서 초유사 임명을 받고 5월 4일, 경상우도 함양에 도착하여 초유문을 지어 배포했다. 초유문에는 몸을 바쳐 왜구를 토벌하고 나라를 지키자는 내용, 즉 의병 모집의 뜻을 담고 있었다. 당시 함양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는 군사와 군량이 부족하여 왜군의 침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군의 체제를 수습하고 각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함양을 떠나 진주로 출발하였다. 6월에 진주성이 얼추 안정되자 거창, 합천, 영산, 창녕, 현풍 등을 돌며 군사를 모집하고 민생을 돌보았으며 전쟁으로 떨어진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후 7월에 왜적이 진주성을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출전하여 사천, 진해 고성 등을 탈환하고 곽재우를 보내 현풍, 창녕, 영산 등의 왜적을 토벌하였다.<ref>『학봉집』 부록 제 1권 년보.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210&gunchaId=&NodeId=&setid=1139144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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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전투 | 진주성 전투]] | * [[진주전투 | 진주성 전투]] | ||
− | + | 8월에 경상좌도관찰사로 잠시 떠났다가 다시 우도관찰사로 돌아왔다. 김성일은 의병규합과 군량미 확보에 더욱 힘을 쏟았다. 10월,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시민을 진주 목사로 승진시켜 진주성 방어를 독려하였다. 이때 왜적은 이미 진주성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서 뻗쳐 있었다. 이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하여 지키게 하였다. 첩자를 보내 왜적의 정세를 정탐하는 한편 호남에 통문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의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바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민심을 안정시켰다<ref>『학봉집』 부록 제 1권 년보.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210&gunchaId=&NodeId=&setid=1139144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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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때의 공으로 11월에 특별히 | + | 이 때의 공으로 11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제수되었다. 미처 전란을 수습하기도 전 기근이 닥쳤다. 김성일은 쌀과 소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구휼하였으며 여러 고을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구황에 힘썼다. 그러는 동안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당뇨병)이 깊어졌다. |
− | 또 김성일은 닥친 일을 수습하는 | + | 또 김성일은 닥친 일을 수습하는 데서 나아가 전쟁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가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종자들을 관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ref>『학봉집』 부록 제 2권.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tkcdb/text/textViewPopup2.jsp?bizName=MM&seojiId=kc_mm_a210&gunchaId=cv002&muncheId=01&finId=001&startTransText=kc_mk_m002_gv002_001&endTransText=kc_mk_m002_gv002_001&startOrgnText=kc_mk_m002_gv002_001&endOrgnText=kc_mk_m002_gv002_001&startPage=&endPage=&startOrgnMark=&endOrgnMark=&N2chkVal=0&setid=-1&Pos=-1 행장]",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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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일이 아내 | + |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편지를 쓴 시기와 장소는 1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후 산읍에 도착했을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아내는 홀몸으로 어머니를 모시며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며 자신은 감사를 지냄에도 곡식을 보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사재를 털어 백성 구휼에 힘쓰느라 집에 부칠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에 나타난 도적은 왜적을 가리키는 것이며,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고 후일을 대비하던 김성일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김성일은 다음 해인 1593년 4월에 병사했다. |
− | + | 이 편지를 쓸 당시 김성일은 구황과 내년 경작 대비, 전쟁 대비로 인해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도 이루지 못했고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구절로 보아 아마 이 시기의 과로가 병의 원인이 된 듯하다. 그런 와중에도 아내에게 편지를 부친 것을 볼 때 아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는 김성일이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이다. | |
− | 부인 안동 권씨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 + | 부인 안동 권씨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ref>『학봉집』 부록 제 2권.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tkcdb/text/textViewPopup2.jsp?bizName=MM&seojiId=kc_mm_a210&gunchaId=cv002&muncheId=01&finId=001&startTransText=kc_mk_m002_gv002_001&endTransText=kc_mk_m002_gv002_001&startOrgnText=kc_mk_m002_gv002_001&endOrgnText=kc_mk_m002_gv002_001&startPage=&endPage=&startOrgnMark=&endOrgnMark=&N2chkVal=0&setid=-1&Pos=-1 행장]",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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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4일 (목) 23:14 기준 최신판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
영문명칭 | Kim Seongil's Korean letter to his wife |
---|---|
작자 | 김성일 |
작성시기 | 1592년 |
소장처 | 의성김씨 학봉종택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1.2×43.2㎝ |
판본 | 필사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목차
정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1592년(조선 선조 25) 12월 말에 아내 안동권씨에게 쓴 편지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경상우도감사로 부임하여 임지(任地)인 진주로 이동하는 중에 경남 산음현(현 산청)에 잠시 머무르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안동 본가에서 장모를 모시고 있는 아내 안동권씨(1538-1623)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끝에 발신일을 '서달 스믈나한날'로 적었고 발신자 표시에는 '김'이라 했으며, 봉투에는 '內簡'과 '右監司宅 안동납실'이라고 적은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는 학봉 김성일의 편지 가운데 유일한 한글편지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아내에 대한 애틋함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학, 국문학, 국어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산음에 와서 잠시 머무르고 있는 자신의 안부를 간단히 전한다. 새해를 앞두고 보내는 편지인 만큼 장모를 모시고 새해를 잘 맞이하라고 당부하면서도 감사가 되었어도 음식을 아무것도 보내지 못해 미안해하고 있다. 자신과 떨어져 있을 아내가 염려되었는지 편지 말미에는 그리워하지 말고 편안히 있으라고 하였다. [1]
김성일과 임진왜란
김성일이 아내에게 편지를 쓴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였다. 그가 편지를 쓴 배경을 파악하려면 당시 조선의 시대 상황과 김성일의 행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마산 전투
김성일은 1590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후 1591년 보고서에서 왜적이 침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2년 3월, 경상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에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는 이 일을 문제 삼아 김성일을 파직하였다. 이에 유성룡등이 간청하여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 招諭使)로 발령받게 되었다.[2]
- 초유사(招諭使) 활동
김성일은 충청도 직산에서 초유사 임명을 받고 5월 4일, 경상우도 함양에 도착하여 초유문을 지어 배포했다. 초유문에는 몸을 바쳐 왜구를 토벌하고 나라를 지키자는 내용, 즉 의병 모집의 뜻을 담고 있었다. 당시 함양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는 군사와 군량이 부족하여 왜군의 침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군의 체제를 수습하고 각 고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함양을 떠나 진주로 출발하였다. 6월에 진주성이 얼추 안정되자 거창, 합천, 영산, 창녕, 현풍 등을 돌며 군사를 모집하고 민생을 돌보았으며 전쟁으로 떨어진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후 7월에 왜적이 진주성을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출전하여 사천, 진해 고성 등을 탈환하고 곽재우를 보내 현풍, 창녕, 영산 등의 왜적을 토벌하였다.[3]
8월에 경상좌도관찰사로 잠시 떠났다가 다시 우도관찰사로 돌아왔다. 김성일은 의병규합과 군량미 확보에 더욱 힘을 쏟았다. 10월,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시민을 진주 목사로 승진시켜 진주성 방어를 독려하였다. 이때 왜적은 이미 진주성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서 뻗쳐 있었다. 이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하여 지키게 하였다. 첩자를 보내 왜적의 정세를 정탐하는 한편 호남에 통문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의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곧바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민심을 안정시켰다[4]
이 때의 공으로 11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제수되었다. 미처 전란을 수습하기도 전 기근이 닥쳤다. 김성일은 쌀과 소금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구휼하였으며 여러 고을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구황에 힘썼다. 그러는 동안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당뇨병)이 깊어졌다.
또 김성일은 닥친 일을 수습하는 데서 나아가 전쟁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가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종자들을 관리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5]
- 편지 쓸 당시 상황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편지를 쓴 시기와 장소는 1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후 산읍에 도착했을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아내는 홀몸으로 어머니를 모시며 생활하고 있는 처지이며 자신은 감사를 지냄에도 곡식을 보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사재를 털어 백성 구휼에 힘쓰느라 집에 부칠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에 나타난 도적은 왜적을 가리키는 것이며,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고 후일을 대비하던 김성일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김성일은 다음 해인 1593년 4월에 병사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김성일은 구황과 내년 경작 대비, 전쟁 대비로 인해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도 이루지 못했고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구절로 보아 아마 이 시기의 과로가 병의 원인이 된 듯하다. 그런 와중에도 아내에게 편지를 부친 것을 볼 때 아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는 김성일이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이다. 부인 안동 권씨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6]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해독) |
• 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대부의 삶 |
지식 관계망
- 학봉 김성일가의 한글 고문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김성일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김성일 초유문 | 김성일 | A는 B에 의해 지어졌다 | A dcterms:creator B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김성일의 처 안동 권씨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김성일 | 김성일의 처 안동 권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안동 권씨 | 김성일의 처 안동 권씨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산음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진왜란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임진왜란 | 진주전투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김성일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성일 | 진주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성일 | 이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조종도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김수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곽제우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김시민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이봉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정경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권경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김성일 | 신담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이노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조종도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수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곽제우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시민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김시민 | 진주전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봉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권경호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정경세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권경호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신담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 의성김씨 학봉종택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592년 | 학봉 김성일이 편지를 써서 아내 안동권씨에게 부쳤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6.609771 | 128.669643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가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사진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70쪽.
- ↑ 김명준, 「임진년 진주대첩과 학봉 김성일」, 『경남문화연구소보』 제 30호, 2009.
- ↑ 『학봉집』 부록 제 1권 년보. 온라인 참조: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학봉집』 부록 제 1권 년보. 온라인 참조: "만력 20년(1592, 선조 25) 임진. 선생 55세",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학봉집』 부록 제 2권. 온라인 참조: "행장",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 『학봉집』 부록 제 2권. 온라인 참조: "행장",
『한국문집총간』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원전
- 『학봉집』
- 『용사일기』
- 『선조실록』
- 논문
- 김미영, 『학봉 김성일, 충군애민의 삶을 살다』, 예문서원, 2016.
- 김명준, 「임진년 진주대첩과 학봉 김성일」, 『경남문화연구소보』 제 30호, 2009.
- 김명식, 「임진왜란시 김성일의 외교, 구국활동」,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김해영, 「대소헌 조종도의 행적과 사상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 시(詩)의 사적(事蹟)에 관하여」, 『남명학연구』 38권, 남명학회, 2013.
유용한 정보
- 이완재,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