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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15-43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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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16:54 기준 최신판
특별기고: 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
일요(日遙) | |
대표명칭 | 일요 |
---|---|
한자 | 日遙 |
생몰년 | 1580년-1659년 |
이칭 | 일요상인(日遙上人), 고려일요(高麗日遙), 고려상인(高麗上人) |
성씨 | 여씨(余氏) |
속명 | 여대남(余大男) |
출신지 | 하동 |
정의
조선 출신 일본의 승려.
내용
일요(日遙)는 임진왜란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으로, 본명은 여대남(余大男)이다. 아버지는 여천갑(余天甲)이다.
보현암(普賢菴)에서 공부를 하던 중 왜군 다카하시(高橋三九)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기요마사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여대남이 써서 올린 당 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기 곁에 두고 보살폈다.[1]
그 후 여대남은 일본 히고(肥後) 지방으로 압송되어 승려가 되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측근 중에는 일진(日眞)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울산(蔚山)에서 평화를 의론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진은 여대남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의 주요 불교강원인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
이후 신연산(身延山) 구원사(久遠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하였다. 이 때 일진은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구마모토의 본묘사(本妙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1608년 일요(日繞)에게 주지직을 물려주고 은퇴를 하였으나, 2대 주지가 된 일요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1609년 일요가 3대 주지직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조선출신이라는 점을 알고 고려상인(高麗上人), 고려요사(高麗謠師)라고 하며 존경을 했다고 한다.[3]
일요는 한 때 신변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편지왕래 조차 막혔다. 1659년 12월 16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본묘사에 그의 묘가 있다.[4]
지식 관계망
- 사명대사 유정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일요 | 가토 기요마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일요 | 일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일요 | 혼묘지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일요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일진 | 일요 | A는 B의 스승이다 |
주석
-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22쪽.
-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참고문헌
- 안영진,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중도일보』online , 작성일: 2008년 1월 9일. - 노성환,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 『일본어문학』46, 일본어문학회, 2009, 415-4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