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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718년에 [[유명천]]의 부인 [[유명천 처 한산 이씨|한산이씨]]가 60세에 쓴 회고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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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년에 [[유명천]]의 부인 [[유명천 처 한산 이씨|한산이씨]]가 60세를 맞아 쓴 회고록이다.
  
 
==내용==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718년(숙종44)에 [[유명천]](柳命天, 1633~1705)의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1659~1727)가 60세에 쓴 회고록이다.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기문에 따르면 한산이씨가 자신의 행적을 자손들에게 남기기 위하여 손수 한글로 쓴 것 이라고 한다.『고행록』에는 한산이씨의 탄생부터 회갑까지의 삶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숙종]]조 [[남인]] 사대부가의 부인으로서 18세에 정3품 숙부인, 22세에 정2품 정부인, 33세에 정1품 [[정경부인]]에 이르렀으나, 정치적 환국에 휘말린 남편을 따라 각지의 유배소를 떠돌며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아이를 잃었으나 종통(宗統)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던 일, 시어머니와 남편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47세의 미망인으로 집안을 굳건하게 지켜냈던 일 등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였다. 며느리 둘을 잃고 세 번째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얻은 뒤 69세에 생을 마쳤다.『고행록』은 한산이씨가 유배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집안일만 서술했으나, [[숙종]]조 [[남인]] 사대부가의 운명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고행록』은 [[진주유씨]] 가문의 가보로서 남다른 방법으로 전승되어왔다. 1925년에 6대손 [[유원성]](柳遠聲, 1851~1945)이 읽고 손부 [[권태임]](權泰妊, 1908~1967)이 받아쓰는 방식으로 전사본을 제작했고, 2012년에는 [[권태임]]의 딸 [[유미형]](柳美馨)이 또 다른 전사본을 만들었다. 자손 대대로 읽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3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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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기문에 따르면 한산이씨(韓山李氏, 1659~1727)가 자신의 행적을 자손들에게 남기기 위하여 손수 한글로 쓴 것 이라고 한다.『고행록』에는 한산이씨의 탄생부터 회갑까지의 삶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숙종]]조 [[남인]] 사대부가의 부인으로서 18세에 정3품 숙부인, 22세에 정2품 정부인, 33세에 정1품 [[정경부인]]에 이르렀으나, 정치적 환국에 휘말린 남편 [[유명천]](柳命天, 1633~1705)을 따라 각지의 유배소를 떠돌며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아이를 잃었으나 종통(宗統)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던 일, 시어머니와 남편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47세의 미망인으로 집안을 굳건하게 지켜냈던 일 등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였다. 며느리 둘을 잃고 세 번째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얻은 뒤 69세에 생을 마쳤다.『고행록』은 한산이씨가 유배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집안일만 서술했으나, [[숙종]]조 [[남인]] 사대부가의 운명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고행록』은 [[진주유씨]] 가문의 가보로서 남다른 방법으로 전승되어왔다. 1925년에 6대손 [[유원성]](柳遠聲, 1851~1945)이 읽고 손부 [[권태임]](權泰妊, 1908~1967)이 받아쓰는 방식으로 전사본을 제작했고, 2012년에는 [[권태임]]의 딸 [[유미형]](柳美馨)이 또 다른 전사본을 만들었다. 자손 대대로 읽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34쪽.</REF>
  
 
===한산이씨의 생애와 고행록 저술===
 
===한산이씨의 생애와 고행록 저술===
한산이씨는 [[이산해]]의 현손녀(玄孫女:증손자의 딸)이다. 남인 명문가집안인 [[유명천]]의 세번째 부인으로 시집간다(1676년). [[유명천]]은 1672년에 벼슬길에 오르나 1680년에 [[경신환국]]을 맞아 음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유명천은 48세, 한산이씨는 22세로 시집온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장녀(1678년에 낳았으나 5개월 만에 잃음)와 차녀(1679년에 낳았으나 그 다음해 5월에 잃음)에 이어 귀양가서 낳은 아들도 한 달 만에 잃는다. [[기사환국]](1689년)으로 남인이 대거 정계로 복귀되는데 남편 유명천도 이때 돌아온다. 1697년에는 유명천의 동생 [[유명현|유명현(柳命賢)]]의 아들 [[유매|유매(柳楳)]]를 양자로 들인다. 1699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유배된다. 그리고 2년 후 1701년 [[장희빈|희빈 장씨]]의 복위를 꾀했다는 서인들의 무고로 일가가 유배되고, 거기서 유명천은 죽음(1705년)을 맞이한다. 1710년에는 첫째 며느리가 죽고, 두번째 며느리도 죽는다. 한산이씨가 『[[한산이씨 고행록]]』을 쓰던 당시에는 세번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외동 손자 [[유경종]]에 의지해 여생을 버티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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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는 [[이산해]]의 현손녀(玄孫女:증손자의 딸)이다. 남인 명문가집안인 [[유명천]]의 세번째 부인으로 시집간다(1676년). [[유명천]]은 1672년에 벼슬길에 오르나 1680년에 [[경신환국]]을 맞아 음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유명천은 48세, 한산이씨는 22세로 시집온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장녀(1678년에 낳았으나 5개월 만에 잃음)와 차녀(1679년에 낳았으나 그 다음해 5월에 잃음)에 이어 귀양가서 낳은 아들도 한 달 만에 잃는다. [[기사환국]](1689년)으로 남인이 대거 정계로 복귀되는데 남편 유명천도 이때 돌아온다. 1697년에는 유명천의 동생 [[유명현|유명현(柳命賢)]]의 아들 [[유매|유매(柳楳)]]를 양자로 들인다. 1699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유배된다. 그리고 2년 후 1701년 [[장희빈|희빈 장씨]]의 복위를 꾀했다는 서인들의 무고로 일가가 유배되고, 거기서 유명천은 죽음(1705년)을 맞이한다. 1710년에는 첫째 며느리가 죽고, 두 번째 며느리도 죽는다. 한산이씨가 『[[한산이씨 고행록]]』을 쓰던 당시에는 세 번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외동 손자 [[유경용]]에 의지해 여생을 버티던 중이었다. <ref>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5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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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고행록]]의 특징===
 
===[[한산이씨 고행록]]의 특징===
 
『[[한산이씨 고행록]]』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죄로 인해 자녀들을 본인보다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회환과 노년의 고독이 주를 이룬다. 또한 '무슨 죄벌로 육십지년(六十之年)이 되도록 있어 서러우며 괴로운가 한하며 탄하노라'라고 글을 끝내고 있다. 즉 이 고행록의 저술 동기는 정치적 고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회환과 고독한 노년의 삶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ref>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41-46쪽.</ref> 사실적이면서도 지극히 절제된 정서의 표현과 한 여인의 일대기를 읽는 듯한 수사적 표현의 다양성, 숱한 분노와 격정을 승화시킨 관용의 독백 등을 볼 때 『[[한산이씨 고행록]]』의 문학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ref>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54쪽.</ref>
 
『[[한산이씨 고행록]]』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죄로 인해 자녀들을 본인보다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회환과 노년의 고독이 주를 이룬다. 또한 '무슨 죄벌로 육십지년(六十之年)이 되도록 있어 서러우며 괴로운가 한하며 탄하노라'라고 글을 끝내고 있다. 즉 이 고행록의 저술 동기는 정치적 고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회환과 고독한 노년의 삶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ref>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41-46쪽.</ref> 사실적이면서도 지극히 절제된 정서의 표현과 한 여인의 일대기를 읽는 듯한 수사적 표현의 다양성, 숱한 분노와 격정을 승화시킨 관용의 독백 등을 볼 때 『[[한산이씨 고행록]]』의 문학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ref>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5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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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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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단행본
 
*단행본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고행록』,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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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행록』,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김영배, 『한산 이씨 고행록의 어문학적 연구』, 태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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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58 -안산 진주유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58 -안산 진주유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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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 동양어문학회 편집부, 「고행록·주해」, 『동악어문학』33, 동악어문학회, 1998.
+
** 김영배, 『한산 이씨 고행록의 어문학적 연구』, 태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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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어문학회 편집부, 「고행록·주해」, 『동악어문학』33, 동악어문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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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유용한 정보===
 
*고경석, "[http://www.hankookilbo.com/v/670768a32bd649bf8c43c0fb6b148ff3 300년 된 가보 ‘고행록’ 50년 관리… 또 다른 고행]", 『한국일보』, 작성일: 2016년 7월 14일.
 
*고경석, "[http://www.hankookilbo.com/v/670768a32bd649bf8c43c0fb6b148ff3 300년 된 가보 ‘고행록’ 50년 관리… 또 다른 고행]", 『한국일보』, 작성일: 2016년 7월 14일.
 
 
  
 
[[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분류:이혜영]]
 
 
[[분류:전시자료]]
 
[[분류:전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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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헌]]

2017년 12월 9일 (토) 22:36 기준 최신판

한산이씨 고행록
한글팀 한산이씨 고행록01 고행록.jpg
한자명칭 韓山李氏 苦行錄
영문명칭 An autobiography of Madame Yi of Hansan
작자 유명천 처 한산 이씨
간행시기 1718년
소장처 진주유씨 모산종택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34.0×584.2㎝
판본 필사본
수량 1축
표기문자 한글


정의

1718년에 유명천의 부인 한산이씨가 60세를 맞아 쓴 회고록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기문에 따르면 한산이씨(韓山李氏, 1659~1727)가 자신의 행적을 자손들에게 남기기 위하여 손수 한글로 쓴 것 이라고 한다.『고행록』에는 한산이씨의 탄생부터 회갑까지의 삶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숙종남인 사대부가의 부인으로서 18세에 정3품 숙부인, 22세에 정2품 정부인, 33세에 정1품 정경부인에 이르렀으나, 정치적 환국에 휘말린 남편 유명천(柳命天, 1633~1705)을 따라 각지의 유배소를 떠돌며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아이를 잃었으나 종통(宗統)을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던 일, 시어머니와 남편을 차례로 떠나보내고 47세의 미망인으로 집안을 굳건하게 지켜냈던 일 등을 시간 순으로 기록하였다. 며느리 둘을 잃고 세 번째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얻은 뒤 69세에 생을 마쳤다.『고행록』은 한산이씨가 유배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집안일만 서술했으나, 숙종남인 사대부가의 운명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고행록』은 진주유씨 가문의 가보로서 남다른 방법으로 전승되어왔다. 1925년에 6대손 유원성(柳遠聲, 1851~1945)이 읽고 손부 권태임(權泰妊, 1908~1967)이 받아쓰는 방식으로 전사본을 제작했고, 2012년에는 권태임의 딸 유미형(柳美馨)이 또 다른 전사본을 만들었다. 자손 대대로 읽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1]

한산이씨의 생애와 고행록 저술

한산이씨는 이산해의 현손녀(玄孫女:증손자의 딸)이다. 남인 명문가집안인 유명천의 세번째 부인으로 시집간다(1676년). 유명천은 1672년에 벼슬길에 오르나 1680년에 경신환국을 맞아 음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때가 유명천은 48세, 한산이씨는 22세로 시집온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장녀(1678년에 낳았으나 5개월 만에 잃음)와 차녀(1679년에 낳았으나 그 다음해 5월에 잃음)에 이어 귀양가서 낳은 아들도 한 달 만에 잃는다. 기사환국(1689년)으로 남인이 대거 정계로 복귀되는데 남편 유명천도 이때 돌아온다. 1697년에는 유명천의 동생 유명현(柳命賢)의 아들 유매(柳楳)를 양자로 들인다. 1699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유배된다. 그리고 2년 후 1701년 희빈 장씨의 복위를 꾀했다는 서인들의 무고로 일가가 유배되고, 거기서 유명천은 죽음(1705년)을 맞이한다. 1710년에는 첫째 며느리가 죽고, 두 번째 며느리도 죽는다. 한산이씨가 『한산이씨 고행록』을 쓰던 당시에는 세 번째 며느리에게서 얻은 외동 손자 유경용에 의지해 여생을 버티던 중이었다. [2]

한산이씨 고행록의 특징

한산이씨 고행록』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죄로 인해 자녀들을 본인보다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회환과 노년의 고독이 주를 이룬다. 또한 '무슨 죄벌로 육십지년(六十之年)이 되도록 있어 서러우며 괴로운가 한하며 탄하노라'라고 글을 끝내고 있다. 즉 이 고행록의 저술 동기는 정치적 고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회환과 고독한 노년의 삶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사실적이면서도 지극히 절제된 정서의 표현과 한 여인의 일대기를 읽는 듯한 수사적 표현의 다양성, 숱한 분노와 격정을 승화시킨 관용의 독백 등을 볼 때 『한산이씨 고행록』의 문학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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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고행록 (해독)


지식 관계망

  • 한산이씨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한산이씨 고행록 유명천 처 한산 이씨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유명천 처 한산 이씨 유명천 A는 B의 아내이다 A ekc:hasHusband B
유명현 유명천 A는 형제 B가 있다 A ekc:hasBrother B
유명현 유매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유명천 유매 A는 양자 B를 두었다 A ekc:hasAdoptedHeir B
유뢰 유경종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유명현 유뢰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유매 유경용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한산이씨 고행록기문 유경종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한산이씨 고행록기문 한산이씨 고행록 A는 B에 포함된다 A dcterms:isPartOf B
경신환국 유명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기사환국 유명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술환국 유명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유명천 유원성 A는 B의 선조이다 A ekc:hasDescendant B
유원성 권태임 A는 B의 남편이다 A ekc:hasWife B
한산이씨 고행록 권태임 A는 B에 의해 필사되었다 A dcterms:publisher B
유미형 유원성 A는 딸 B를 두었다 A ekc:hasDaughter B
한산이씨 고행록 유미형 A는 B에 의해 필사되었다 A dcterms:publisher B
한산이씨 고행록 진주유씨 모산종택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18년 한산이씨한산이씨 고행록을 저술하였다.
1925년 권태임한산이씨 고행록을 필사했다.
2012년 유미형한산이씨 고행록을 필사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42468 126.872910 진주유씨 모산종택한산이씨 고행록을 소장하였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34쪽.
  2. 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54쪽.
  3. 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41-46쪽.
  4. 김갑기, 「《苦行錄》의 著述背景과 文學的 가치」, 『교육과학연구』11,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54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행록』,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58 -안산 진주유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논문
    • 김영배, 『한산 이씨 고행록의 어문학적 연구』, 태학사, 1999.
    • 동양어문학회 편집부, 「고행록·주해」, 『동악어문학』33, 동악어문학회, 1998.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