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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사정전]]의 앞에 있으며, 총 10개의 방으로 나뉘어있다. 천자문의 앞 10자를 따서 배열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다. 맨 처음 '천자고', '지자고' 부터 마지막 '월자고'까지이다. | [[경복궁 사정전]]의 앞에 있으며, 총 10개의 방으로 나뉘어있다. 천자문의 앞 10자를 따서 배열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다. 맨 처음 '천자고', '지자고' 부터 마지막 '월자고'까지이다. | ||
<ref>박석희·최식원·황금희, 『경복궁에서 세종과 함께 찾는 조선의 정체성』, 미다스북스, | <ref>박석희·최식원·황금희, 『경복궁에서 세종과 함께 찾는 조선의 정체성』, 미다스북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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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22:13 기준 최신판
내탕고(內帑庫) | |
대표명칭 | 내탕고 |
---|---|
한자표기 | 內帑庫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경복궁 사정전 |
창립시대 | 조선 |
담당업무 | 왕실 재산 보관 창고 |
관련단체 | 내수사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던 창고이자 그것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내용
기관으로서의 내탕고, 내수사
내수사(內需司)는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내탕고는 때로 내수사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1] 내수사는 함흥에 있는 조선 태조와 조선 태종의 사가(私家) 재산을 관리하던 부서였다. 그러다 조선 세종 때 그 업무가 확대되어 국가 공식기구로 등록되었다. 조선 성종 대 이후 내수사에서 관리하는 왕실농장의 고리대금이 심해지자, 왕실의 재산은 모두 국가의 재산인데 왕실이 사사로이 재산을 축적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어나 내수사 폐지가 논의된다. [2] 그러나 매번 논의에만 그치다가 1801년 조선 순조 대에 내수사의 노비가 혁파되었고 조선 고종대에 폐지되었다. [3]
창고로서의 내탕고
내탕고는 금, 은, 비단, 음식 등 왕실의 재물을 보관하던 창고이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 백성이 곤궁하게 되었을 때, 이 내탕고의 재물로써 구휼하기도 하고, 관료들에게 포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큰외숙모 여흥민씨에게 보낸 한글편지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내탕고의 재물은 왕실의 사사로운 사용 뿐 아니라, 왕실의 체면과 권위를 유지하는 재원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4] 경복궁 사정전의 앞에 있으며, 총 10개의 방으로 나뉘어있다. 천자문의 앞 10자를 따서 배열 순서대로 이름을 붙였다. 맨 처음 '천자고', '지자고' 부터 마지막 '월자고'까지이다. [5]
지식관계망
- 정조가 큰외숙모 여흥민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내탕고 | 조선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내탕고 | 조선 태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정조가 큰외숙모 여흥민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 내탕고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내탕고 | 경복궁 | A는 B에 위치한다 | A dcterms:isPartOf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801 | 조선 순조가 내탕고의 노비를 혁파하였다. |
조선후기 | 조선 고종이 내탕고를 폐지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0885 | 126.9748553 | 내탕고는 경복궁에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정현재, "내탕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숙연, 「조선전기(朝鮮前期) 내수사(內需司) 폐지 논쟁과 군주(君主)의 위상」, 『대동문화연구』 84,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3, 137-140쪽.
- ↑ 정현재, "내수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현재, "내탕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석희·최식원·황금희, 『경복궁에서 세종과 함께 찾는 조선의 정체성』, 미다스북스, 2013.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지승종, 「조선전기 내수사의 성격과 내수사노비」, 『한국학보』11, 일지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