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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대의 전쟁으로 흔들린 왕권을 재확립하고자 군비 강화에 힘썼다. 재정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호구수를 정비하고 농업을 진작하고 조세제도를 체계화하였다. 재위 동안 2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겪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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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종의 재위기간에는 남명(南明)이 멸망하여 북벌논의도 중단되었다. 남명의 멸망으로 청(淸)이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더 이상 복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ref>허태용, 「17, 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大東文化硏究』 6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378-379쪽.</ref> | ||
+ | [[효종]]의 승하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는 둘째 아들인 효종의 종통(宗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송시열|송시열(宋時烈)]], [[송준길|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왕사동례(王士同禮)를 주장하였다. 왕이나 사대부나 서자는 같은 예법을 적용해야 하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통을 계승한 왕은 사대부와 다르다는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한 [[허목|허목(許穆)]], [[윤휴|윤휴(尹鑴)]] 등의 남인은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 ||
+ | 서인은 [[효종]]을 차자(次子)로 본 반면,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자(長子)의 예를 적용하려 한 것이다. 1차 예송(禮訟)에서는 서인들의 설이 우세하여 [[허목]]을 지지하였던 [[윤선도|윤선도(尹善道)]] 등이 삭탈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ref>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2, 역사문화, 2013, 101~107쪽.</ref> | ||
+ | 예송논쟁은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가 사망한 뒤 [[장렬왕후]]의 복제문제를 놓고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에도 서인과 남인은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대공복(大功服)’을 놓고 대립하였다.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김우명(金佑明)]]과 척신들이 남인의 손을 들었고 현종 역시 남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ref>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2, 역사문화, 2013, 140~144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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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구리시에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이 | + | 경기도 구리시에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이 있다. 1970년 5월 26일 건원릉(健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수릉(綏陵)과 함께 사적 제 193호에 '동구릉(東九陵)'으로 지정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930000,31 숭릉]", 문화재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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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dh.aks.ac.kr/Encyves/Graph/A146/A146.htm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지식관계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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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태용, 「17, 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大東文化硏究』 6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 * 허태용, 「17, 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大東文化硏究』 6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 ||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 |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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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 ===더 읽을거리===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222 현종]",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222 현종]",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24 현종]", 콘텐츠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224 현종]", 콘텐츠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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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월) 23:04 기준 최신판
현종(顯宗) | |
대표명칭 | 현종 |
---|---|
한자표기 | 顯宗 |
생몰년 | 1641년 2월 4일-1674년 8월 18일(음) 재위 1659년 5월 9일-1674년 8월 18일(음) |
본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호 | 휘 연(棩) |
자 | 경직(景直) |
출생지 | 청나라 선양 |
사망지 | 창덕궁 재려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왕 |
배우자 | 명성왕후(明聖王后) |
부 | 효종(孝宗) |
모 | 인선왕후(仁宣王后) |
자녀 | 1남 3녀, 명선공주(明善公主), 숙종(肅宗), 명혜공주(明惠公主), 명안공주(明安公主) |
전임자 | 효종(孝宗) |
후임자 | 숙종(肅宗) |
능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숭릉(崇陵) 37.616043, 127.127244 |
성격 | 인물 |
유형 | 왕 |
목차
정의
조선의 제 18대 왕이다.
내용
선대의 전쟁으로 흔들린 왕권을 재확립하고자 군비 강화에 힘썼다. 재정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호구수를 정비하고 농업을 진작하고 조세제도를 체계화하였다. 재위 동안 2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겪었다.
생애
효종이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인 1641년 심양(瀋陽)에서 태어났다. 현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1] 효종이 즉위할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자 제18대 왕으로 즉위하였다.[3] 현종의 재위기간에는 남명(南明)이 멸망하여 북벌논의도 중단되었다. 남명의 멸망으로 청(淸)이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더 이상 복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4] 효종의 승하로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는 둘째 아들인 효종의 종통(宗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왕사동례(王士同禮)를 주장하였다. 왕이나 사대부나 서자는 같은 예법을 적용해야 하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통을 계승한 왕은 사대부와 다르다는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한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의 남인은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인은 효종을 차자(次子)로 본 반면,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자(長子)의 예를 적용하려 한 것이다. 1차 예송(禮訟)에서는 서인들의 설이 우세하여 허목을 지지하였던 윤선도(尹善道) 등이 삭탈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5] 예송논쟁은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사망한 뒤 장렬왕후의 복제문제를 놓고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에도 서인과 남인은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대공복(大功服)’을 놓고 대립하였다.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金佑明)과 척신들이 남인의 손을 들었고 현종 역시 남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6]
사후
경기도 구리시에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이 있다. 1970년 5월 26일 건원릉(健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수릉(綏陵)과 함께 사적 제 193호에 '동구릉(東九陵)'으로 지정되었다.[7]
거행 의례
현종왕세손책례도감의궤[8] 현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9]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현종 | 명성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현종 | 왕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현종 | 왕세손 책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
현종 | 왕세자 책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현종 | 즉위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49년 2월 18일 | 현종은 왕세손은 책례를 거행하였다 |
1649년 5월 13일 | 현종은 왕세자는 책례를 거행하였다 |
1649년 5월 13일 | 현종은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80898 | 126.994425 | 창덕궁 인정전에서 효종 왕세손 책봉례을 거행하였다 |
37.578814 | 126.991084 |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세자의 책봉례을 거행하였다 |
37.578814 | 126.991084 | 창덕궁 인정문에서 현종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10]
주석
- ↑ 『仁祖實錄』 27년(1649) 2월 丁未: 「上御仁政殿冊封元孫爲王世孫」
- ↑ 『孝宗實錄』 즉위년(1645) 5월 辛未: 「大臣禮官三司請嗣位王號泣不聽」
- ↑ 『顯宗實錄』 즉위년(1659) 5월 己巳: 「昧爽掖庭署先設褥位于殯殿東庭中央設幕次于敦禮門東夾內」
- ↑ 허태용, 「17, 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大東文化硏究』 6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378-379쪽.
- ↑ 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2, 역사문화, 2013, 101~107쪽.
- ↑ 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2, 역사문화, 2013, 140~144쪽.
- ↑ "숭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 ↑ "현종왕세손책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 외규장각 의궤. - ↑ "현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 외규장각 의궤. - ↑ "구리 숭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인조실록』
- 『효종실록』
- 『현종실록』
- 이봉규, 「예송의 철학적 분석에 대한 재검토」, 『大東文化硏究』 3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6.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이희환, 「현종대의 기해예송」, 『역사학연구』 29, 호남사학회, 2007.
- 지두환, 『조선시대정치사』 2, 역사문화, 2013.
- 최근덕, 「조선조 예송의 배경과 발단에 관한 연구」, 『東洋哲學硏究』 24, 동양철학연구회, 2001.
- 허태용, 「17, 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大東文化硏究』 6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