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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후궁으로 처음에는 궁인으로 입궁하여 [[명성황후|명성황후(明成皇后)]]가 죽은 뒤 [[영친왕 이은|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낳았다.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 | [[고종]]의 후궁으로 처음에는 궁인으로 입궁하여 [[명성황후|명성황후(明成皇后)]]가 죽은 뒤 [[영친왕 이은|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낳았다.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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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순헌황후는 8세에 궁녀로 들어가 32세 때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고종의 승은을 입고 궁에서 쫓겨났다가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ref>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206쪽.</ref> 1897년(고종 34년) [[영친왕 이은|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을 낳았으며, 이로 인하여 ‘귀인(貴人)’이 되었다가,<ref>『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22일 양력 1번째 기사, ‘궁인 엄씨를 귀인으로 봉작하다.’</ref> 다음해 [[순헌황후|순빈(淳嬪)]]에 책봉되었다.<ref>『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8월 3일 양력 2번째 기사, ‘귀인 엄씨를 순빈에, 궁인 이씨를 소의에 책봉하다.’</ref> 1901년에는 순비(淳妃)로 책봉이 되었으며,<ref>『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0월 14일 양력 1번째 기사, ‘순빈 엄씨를 순비로 책봉하다.’</ref> 내전(內殿)에서 [[조현례]]를 행하였다.<ref>『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0월 14일 양력 2번째 기사, ‘내전에서 순비가 조현례를 가지다.’</ref> [[명성황후]]가 살해된 이후 [[고종]]이 재혼을 하지 않아 [[황후]]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순헌황후|순비]]를 [[황후]]로 책봉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ref>『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12월 2일 양력 3번째 기사, ‘김사철이 순비를 황후로 올릴 것을 청하다.’</ref> 고종이 거절하여 황귀비(皇貴妃)에 머물렀다.<ref>『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12월 25일 양력 1번째 기사, ‘순비 엄씨를 황귀비에 책봉하다.’</ref> 순헌황후는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양정의숙|양정의숙(養正義塾)]], [[진명여학교|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숙명여학교|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설립을 지원했으며, [[궁녀]]들을 입학시켜 근대교육을 시켰다.<ref>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221~223쪽.</ref> 1911년(순종 4) 7월 20일 승하하여, 시호를 '순헌(純獻)'으로 정해 [[순헌황후|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되었다.<ref>『순종실록부록』 2권, 순종 부록 4년 7월 20일 양력 2번째 기사, ‘귀비 엄씨가 덕수궁의 즉조당에서 돌아가시다.’</ref>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에 묻혔으며, [[영휘원]]은 [[숭인원|숭인원(崇仁園)]]과 함께 1991년 사적 제 361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610000,11 문화재청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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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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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16:37 기준 최신판
순헌황후(純獻皇后) | |
대표명칭 | 순헌황후 |
---|---|
한자표기 | 純獻皇后 |
생몰년 | 1854년 2월 2일(양)-1911년 7월 20일(양) |
이칭 | 순비(淳妃), 엄비(嚴妃), 황귀비(皇貴妃),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서소문방 |
사망지 |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 |
시대 | 조선 |
배우자 |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高宗) |
자녀 |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
전임자 | 명성황후 |
능묘 | 영휘원(永徽園) 37.5885055, 127.0424934 |
성격 | 인물 |
유형 | 황후 |
정의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후궁이다.
내용
고종의 후궁으로 처음에는 궁인으로 입궁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죽은 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낳았다.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학교 설립을 지원하였다.
생애
순헌황후는 8세에 궁녀로 들어가 32세 때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고종의 승은을 입고 궁에서 쫓겨났다가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1] 1897년(고종 34년)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을 낳았으며, 이로 인하여 ‘귀인(貴人)’이 되었다가,[2] 다음해 순빈(淳嬪)에 책봉되었다.[3] 1901년에는 순비(淳妃)로 책봉이 되었으며,[4] 내전(內殿)에서 조현례를 행하였다.[5] 명성황후가 살해된 이후 고종이 재혼을 하지 않아 황후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순비를 황후로 책봉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6] 고종이 거절하여 황귀비(皇貴妃)에 머물렀다.[7] 순헌황후는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아 양정의숙(養正義塾),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설립을 지원했으며, 궁녀들을 입학시켜 근대교육을 시켰다.[8] 1911년(순종 4) 7월 20일 승하하여, 시호를 '순헌(純獻)'으로 정해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가 되었다.[9]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있는 영휘원에 묻혔으며, 영휘원은 숭인원(崇仁園)과 함께 1991년 사적 제 361호로 지정되었다.[10]
거행 의례
지식 관계망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종 | 순헌황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순헌황후 | 후궁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순헌황후 | 황후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순헌황후 | 책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순헌황후 | 조현례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901년 10월 14일 | 순헌황후의 순비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
1901년 10월 14일 | 순헌황후의 순비 조현례를 거행하였다 |
1903년 12월 25일 | 순헌황후의 황귀비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원삼에 봉대를 착용한 순헌황귀비와 순정효황후.[12]
주석
-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206쪽.
- ↑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22일 양력 1번째 기사, ‘궁인 엄씨를 귀인으로 봉작하다.’
- ↑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8월 3일 양력 2번째 기사, ‘귀인 엄씨를 순빈에, 궁인 이씨를 소의에 책봉하다.’
- ↑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0월 14일 양력 1번째 기사, ‘순빈 엄씨를 순비로 책봉하다.’
- ↑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0월 14일 양력 2번째 기사, ‘내전에서 순비가 조현례를 가지다.’
- ↑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12월 2일 양력 3번째 기사, ‘김사철이 순비를 황후로 올릴 것을 청하다.’
- ↑ 『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12월 25일 양력 1번째 기사, ‘순비 엄씨를 황귀비에 책봉하다.’
-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 221~223쪽.
- ↑ 『순종실록부록』 2권, 순종 부록 4년 7월 20일 양력 2번째 기사, ‘귀비 엄씨가 덕수궁의 즉조당에서 돌아가시다.’
- ↑ 문화재청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 ↑ 순비진봉황귀비의궤
- ↑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부록』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