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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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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김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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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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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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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저서= [[신전자초방]], [[동사록]]
|대표직함= 집의|행주판관|경상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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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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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지위 및 활동===
순성(順誠)의 현손이며, 아버지는 영동현감 표()이다. 재종숙 양()에게 입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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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조선 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숙종 18)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민취도(閔就道)]]를 역관으로서 수행했는데, 이 때 [[민취도]]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요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자초법 시행을 국법으로 엄금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그 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거듭 알아보고 다녀 결국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694년(숙종 20) 실험에 성공했으나, [[김지남]]을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ref> 김효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599 김지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사회적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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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593년 정자가 된 이어, 지제교·수찬·교리·응교·정언·사간·장령·집의·필선·보덕·승지, 예조·병조·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행주판관, 경기·평안·전라·강원도의 도사를 거쳐서 경상감사 및 남양·순천·상주·청풍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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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남구만(南九萬)]]의 지시로 따라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다. 성과가 매우 크자 [[조선 숙종]]의 윤허를 얻어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하여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다. 이 책은 1796년 [[조선 정조]]에 의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조선 숙종|숙종]]이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양사(兩司)에서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 제수는 부당하다고 반대하여 외직인 문성첨사(文城僉使)에 임명되었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 대표가 회동할 때, 아들 [[김경문|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수행해 청나라 대표 [[목극등|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공이 컸다.  <ref> 김효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599 김지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사건===
+
===학문적 성취===
1613년(광해군 5) 집의로 있을 때,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영창대군을 죽이자고 주장하는 지평 정호관(丁好寬)을 면박했고,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이이첨(李爾瞻) 일당에 반대하면서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때 임명된 조신들이 외직에서 모두 파직되었으나 특별히 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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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文詞)와 중국어에 유창해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통문관지(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 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조선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저서로 『[[신천자초방|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동사록|동사록(東槎錄)]]』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통문관지(通文館志)]]』가 있다. 특히 『[[신전자초방]]』에 대해 [[조선 정조|정조]]는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ref> 김효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599 김지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ref> 박익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597 김지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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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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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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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宣祖139年(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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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국조방목(國朝榜目)』, 高宗年間(1863-1907)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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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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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인조실록(仁祖實錄)』, 孝宗 4(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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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圖書解題』, 朝鮮通信社, 大正8[191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光武 11(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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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光武 11(1907)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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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실록(正祖實錄)』, 純祖 5(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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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19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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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正祖 20(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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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실록(肅宗實錄)』, 英祖 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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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문관지(通文館志)』, 肅宗 46(1720)後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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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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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호, 「17~18세기 병서(兵書) 언해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
** 박성래, 「역사속 과학인물 - 화약제조법 《신전훈초방》책 쓴 조선조 김지남」, 『과학과 기술』34, 한국과학기술단체총협회, 2001, 42-43쪽.
  
 
[[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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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00:48 기준 최신판

김지남(金指南)
Joseon mungwan mid.png
대표명칭 김지남
한자표기 金指南
생몰년 1654-?
본관 우봉(牛峰) 지금의 황해도 금천
광천(廣川)
계명(季明)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신전자초방, 동사록
대표직함 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사회적 지위 및 활동

1671년(조선 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숙종 18)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閔就道)를 역관으로서 수행했는데, 이 때 민취도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요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자초법 시행을 국법으로 엄금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그 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거듭 알아보고 다녀 결국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694년(숙종 20) 실험에 성공했으나, 김지남을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

공적

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의 지시로 따라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다. 성과가 매우 크자 조선 숙종의 윤허를 얻어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하여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다. 이 책은 1796년 조선 정조에 의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양사(兩司)에서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 제수는 부당하다고 반대하여 외직인 문성첨사(文城僉使)에 임명되었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 대표가 회동할 때,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수행해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이 컸다. [2]

학문적 성취

문사(文詞)와 중국어에 유창해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 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조선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저서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동사록(東槎錄)』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通文館志)』가 있다. 특히 『신전자초방』에 대해 정조는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3]

지식 관계망

  • 신전자초방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지남 김경문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신전자초방 김지남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신전자초방 신전자취염초방언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동사록 김지남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김지남 통문관지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지남 민취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지남 조선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전자초방 조선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신전자초방 조선 정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지남 백두산정계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경문 백두산정계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목극등 백두산정계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지남 신전자초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지남 신전자취염초방언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김효정, "김지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효정, "김지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효정, "김지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진호, 「17~18세기 병서(兵書) 언해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 박성래, 「역사속 과학인물 - 화약제조법 《신전훈초방》책 쓴 조선조 김지남」, 『과학과 기술』34, 한국과학기술단체총협회, 2001, 4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