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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제4차 평양성 전투=== {{전쟁정보_김지선 |해당 전투 = 평양성 전투 |대표명칭 = 제4차 평양성 전투 |날짜 =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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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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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조선 선조]] 26) 1월 6일부터 1월 9일 사이에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평양에서 벌인 네 번째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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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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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이여송|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지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 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선의 [[이일]]·[[김응서]]의 군대와 [[휴정]]과 [[유정]]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였다.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이에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장들은 연광정(練光亭)의 토굴로 모여서 응전하였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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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은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에게 회유책을 썼다. 조명연합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은 데다 막다른 구석에 몰린 일본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버틸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여송]]은 성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제안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황주(黃州)를 거쳐 다음 날 봉산(鳳山)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 둔진했던 일본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다.<ref>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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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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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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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정]] || [[4차 평양전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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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월향]] || [[김응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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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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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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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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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제4차 평양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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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전쟁정보_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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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해당 전투 = 평양성 전투
 
|대표명칭 = 제4차 평양성 전투
 
|날짜 =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 ~ 2월 9일(음력 1월 9일)
 
|관련장소 = 평안도 평양성
 
|결과 = 조명 연합군의 승리, 평양성 탈환
 
|교전국 = 조선/명나라 VS 일본
 
|지휘관 = 류성룡, 김명원, 이일, 김응서, 정희현, 이시언, 정화, 유정, 휴정/이여송, 이여백, 양호, 장세작, 오유충, 이녕, 조승훈 VS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 조선군 8000명, 승병 3000명, 명 원군 4만 3000명 VS 1만 6500명
 
|피해 규모 = 5800명 전사 VS 1200명 전사, 5000여 명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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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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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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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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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006 평양전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제4차 전투가 1592년 12월에 있었다.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 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고 칠성문(七星門)·보통문·함구문(含毬門) 등 세 성문 밖에 진을 쳤다.<br/>
+
===유용한 정보===
이에 조선의 이일(李鎰)·김응서의 군대와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어서 오유충(吳唯忠)·사대수(査大受)와 승군은 모란봉(牡丹峰), 양원(楊元)·장세작(張世爵)은 칠성문, 이여백(李如柏)·이방춘(李芳春)은 보통문, 조승훈·낙상지(駱尙志)는 이일·김응서와 함께 함구문을 공격하도록 하였다.<br/>
+
#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국립중앙도서관』<sup>online</sup></online></html>.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1166&cid=58225&categoryId=58225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제독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며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이에 일본 장수 고니시는 연광정(練光亭)의 토굴로 도망가고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의 제장들도 여기에 모여서 응전하였다.<br/>
+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65985 평양성싸움]",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이 죽을힘을 다할 것을 염려, 성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하였다. 고니시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다.<br/>
+
이에 고니시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황주(黃州)를 거쳐 다음 날 봉산(鳳山)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 둔진했던 일본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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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민족기록화]][[분류:사건]]

2019년 11월 3일 (일) 20:21 기준 최신판

4차 평양전투(平壤戰鬪)
민족팀 일러 성전투.png
대표명칭 4차 평양전투
한자표기 平壤戰鬪
이칭 4차 평양성 전투, 4차 평양성 싸움,
유형 전투
시대 조선
날짜 1593년 1월 6일-1월 9일
관련인물 김명원, 이일, 김응서, 류성룡, 유정, 휴정
관련유물유적 평양성


정의

1593년(조선 선조 26) 1월 6일부터 1월 9일 사이에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평양에서 벌인 네 번째 전투이다.

내용

명나라는 이여송(李如松)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조선을 지원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은 다음 해 1월 6일 이른 아침 조선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선의 이일·김응서의 군대와 휴정유정의 승군도 합세하였다. 전군에 명을 내려 평양성의 서북면을 포위하게 하였다. 이여송은 기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를 지휘하였다.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銀) 50냥을 준다며 사기를 북돋웠다. 이에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장들은 연광정(練光亭)의 토굴로 모여서 응전하였다.[1]

이여송은 막다른 지경에 빠진 왜적들에게 회유책을 썼다. 조명연합군의 손실도 만만치 않은 데다 막다른 구석에 몰린 일본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버틸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여송은 성밖으로 군사를 거두고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성을 열어줄 테니 퇴각하라고 제안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량과 무기가 바닥나고 원군도 오지 않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여송이 이 사실을 조선 진영에 통보하자 조선측은 복병을 철수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중화·황주(黃州)를 거쳐 다음 날 봉산(鳳山)에 이르렀는데, 이 곳에 둔진했던 일본군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조선은 비로소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이 평양성 탈환은 이제까지 후퇴만 계속하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 전투였다.[2]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평양전투 임진왜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평양전투 평양성 A는 B에서 일어났다 A edm:happenedAt B
평양전투 1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평양전투 2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평양전투 3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평양전투 4차 평양전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고니시 유키나가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명원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일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응서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류성룡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유정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휴정 4차 평양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계월향 4차 평양전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계월향 김응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장희, "평양전투",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용한 정보

  1.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국립중앙도서관』online. 온라인 참조: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평양성전투",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평양성싸움", 『doopedia』online,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