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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리 아래에 입기 때문에 하상(下裳)이라고 하며, 붉은 색의 초(綃)로 만든 치마(裳)라고 하여 ‘적초상(赤綃裳)’이라고도 한다. [[백관의 조복]]과 [[백관의 제복]]의 [[조복 하상|하상]]은 모두 홍색이며, 앞쪽의 전상은 양을 상징하는 홀수로 3폭이며, 뒤쪽의 후상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인 4폭으로 각각 따로 만들어 하나의 허리말기로 | + | 허리 아래에 입기 때문에 하상(下裳)이라고 하며, 붉은 색의 초(綃)로 만든 치마(裳)라고 하여 ‘적초상(赤綃裳)’이라고도 한다. [[백관의 조복]]과 [[백관의 제복]]의 [[조복 하상|하상]]은 모두 홍색이며, 앞쪽의 전상은 양을 상징하는 홀수로 3폭이며, 뒤쪽의 후상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인 4폭으로 각각 따로 만들어 하나의 허리말기로 이은 형태이다. [[조복 하상]]의 옆선과 밑단에는 [[조복 상의]]와 같은 색상의 선단이 부착되어 있으며, [[왕]]의 [[면복 하상]]과는 달리 문양이 없다. [[조복 하상]]의 위쪽 허리부분에서 아래쪽 도련부분까지 내려가는 형태 변화는 여자 [[치마]]와 같은 'A'자형에서 일자인 'H'형으로 변화하였다. [[조복 하상]]의 주름을 여자의 [[치마]]와 같이 윗부분만 잡던 것을 17세기 중ㆍ후반에는 주름을 위에서 아래까지 잡아서 풀어지지 않도록 중간과 아래를 실로 고정시킨 일자형으로 변화하였으며, 이후에는 여기에 가선을 다는 형태로 변화하였다.<ref>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한복문화학회, 141~143쪽.</ref> 전상과 후상을 말기에 이을 때 17세기 전반까지는 약간 겹쳤으나, 17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점점 겹치는 정도가 작아지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 완전히 떨어지게 된다.<ref>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141~143쪽.</ref> [[조복 하상]]의 가선은 [[조복 상의]]의 가선 변화에서와 같이 17세기 전반기에는 가선만 있고, 이후 가선사이에 흰색의 가는 선이 나타나며, 가는 선을 끼운 선단을 위에서 상침 바느질하였다. 국말 관복의 간소화 경향이 [[조복 하상]]에서도 나타난다. 여러 의복을 겹쳐 입어야 하는 불편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복 하상]]의 앞뒤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중단(백관)|중단]]에 함께 붙인다거나 [[조복 하상]]을 입었을 때 보이는 부분만을 제작하여 [[조복 상의]]에 붙인 경우도 있다.<ref>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108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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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인천교육대학교 | + |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논문집』 12, 인천교육대학교, 1978. |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
*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名選-下』,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 *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名選-下』,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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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상임ㆍ유관순ㆍ추미경, 「조선후기 죽산(竹山) 박씨 집안의 조복(朝服)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赤綃衣·赤綃裳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6권 5호, 한국의류학회, 2002. | * 임상임ㆍ유관순ㆍ추미경, 「조선후기 죽산(竹山) 박씨 집안의 조복(朝服)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赤綃衣·赤綃裳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6권 5호, 한국의류학회, 2002. |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
− | * 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 + | * 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한복문화학회, 2015.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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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15:17 기준 최신판
조복 하상 (朝服 下裳) |
|
대표명칭 | 조복 하상 |
---|---|
한자표기 | 朝服 下裳 |
이칭별칭 | 적초상(赤綃裳) |
구분 | 의복 |
착용신분 | 백관, 종친 |
착용성별 | 남성 |
정의
조선시대 백관, 종친 등이 국가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초하루, 동짓날, 경축일 등 절일(節日)에 왕에게 하례(賀禮)를 드리는 의례에 참석할 때 하체에 두르는 의례용 치마이다.[1]
내용
허리 아래에 입기 때문에 하상(下裳)이라고 하며, 붉은 색의 초(綃)로 만든 치마(裳)라고 하여 ‘적초상(赤綃裳)’이라고도 한다. 백관의 조복과 백관의 제복의 하상은 모두 홍색이며, 앞쪽의 전상은 양을 상징하는 홀수로 3폭이며, 뒤쪽의 후상은 음을 상징하는 짝수인 4폭으로 각각 따로 만들어 하나의 허리말기로 이은 형태이다. 조복 하상의 옆선과 밑단에는 조복 상의와 같은 색상의 선단이 부착되어 있으며, 왕의 면복 하상과는 달리 문양이 없다. 조복 하상의 위쪽 허리부분에서 아래쪽 도련부분까지 내려가는 형태 변화는 여자 치마와 같은 'A'자형에서 일자인 'H'형으로 변화하였다. 조복 하상의 주름을 여자의 치마와 같이 윗부분만 잡던 것을 17세기 중ㆍ후반에는 주름을 위에서 아래까지 잡아서 풀어지지 않도록 중간과 아래를 실로 고정시킨 일자형으로 변화하였으며, 이후에는 여기에 가선을 다는 형태로 변화하였다.[2] 전상과 후상을 말기에 이을 때 17세기 전반까지는 약간 겹쳤으나, 17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점점 겹치는 정도가 작아지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 완전히 떨어지게 된다.[3] 조복 하상의 가선은 조복 상의의 가선 변화에서와 같이 17세기 전반기에는 가선만 있고, 이후 가선사이에 흰색의 가는 선이 나타나며, 가는 선을 끼운 선단을 위에서 상침 바느질하였다. 국말 관복의 간소화 경향이 조복 하상에서도 나타난다. 여러 의복을 겹쳐 입어야 하는 불편한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복 하상의 앞뒤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중단에 함께 붙인다거나 조복 하상을 입었을 때 보이는 부분만을 제작하여 조복 상의에 붙인 경우도 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백관 | 조복 하상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백관의 조복 | 조복 하상 |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 A dcterms:hasPart B |
조복 하상 | 조복 상의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조복 하상 | 양관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신경유(申景裕, 1581~1633)묘 출토 조복 하상. [5]
밀창군 이직(密昌君 李樴, 1677~1764)묘 출토 조복 하상.[6]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착용한 조복 하상.[7]
밀창군 이직(密昌君 李樴, 1677~1764)의 조복 착용 초상.[11]
이익정(李益炡, 1699~1782)의 조복 착용 초상.[12]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조복 착용 초상.[13]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조복 착용 초상.[14]
영상
주석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90쪽.
- ↑ 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한복문화학회, 141~143쪽.
- ↑ 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2015, 141~143쪽.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108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정사공신 신경유공 묘 출토복식』,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20쪽.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 ↑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 ↑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복식․자수편』, 문화재청, 2006, 120쪽.
- ↑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복식․자수편』, 문화재청, 2006, 120쪽.
- ↑ 문화재청,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복식․자수편』, 문화재청, 2006, 187쪽.
-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147쪽.
-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147쪽.
- ↑ 보물 제1477-2호, 문화재청(http://www.cha.go.kr/cha/).
-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문화재청, 2006, 26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高光林, 「金冠 朝服에 關한 硏究」, 『논문집』 12, 인천교육대학교, 1978.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박물관, 『名選-下』, 단국대학교출판부, 2004.
- 류희경, 『우리옷 이천년』, 미술문화, 2001.
- 李相恩, 『朝鮮王朝服飾史論』, 東方圖書, 1992.
- 李善熙, 「祭服의 起源과 變遷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朴京子, 「祭禮의 思想과 祭服에 關한 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5.
- 석주선, 『한국복식사』, 보진재, 1971.
- 石宙善, 『衣』, 고려서적주식회사, 1985.
- 임상임ㆍ유관순ㆍ추미경, 「조선후기 죽산(竹山) 박씨 집안의 조복(朝服)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赤綃衣·赤綃裳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6권 5호, 한국의류학회, 2002.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최연우, 「조선후기 관원 조복(朝服)의 구성과 형태 연구」, 『한복문화』 제18권 3호, 한복문화학회, 2015.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