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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迦智山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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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가지산선문(迦智山禪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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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개념=[[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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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 보림사|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산선문|선종 산문(禪宗 山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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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흥의 [[장흥 보림사|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산선문|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 하나.
  
 
=='''내용'''==
 
=='''내용'''==
 
===형성과 전개===
 
===형성과 전개===
[[도의|도의(道義, ?-?)]]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장|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았다. 이후 그는 821년([[신라 헌덕왕|헌덕왕]] 13) 무렵에 귀국하였으며 신라 최초의 선종산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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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유학하며 [[지장|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은 [[도의|도의(道義, ?-?)]]821년([[신라 헌덕왕|헌덕왕]] 13) 무렵 귀국하여 신라 최초의 선종(禪宗)산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5쪽.</ref>
  
신라에 돌아온 [[도의]]는 당시의 사람들이 선법(禪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으로 들어가 [[양양 진전사지|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쳐 [[염거|염거(廉居, ?-844)]]에게 법을 전하였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억성사(億聖寺)]]에 오래 머물렀으며, [[체징|체징(體澄, 804-880)]]에게 법을 전하였다. [[체징]]은 837년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 보았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 밖에 따로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신라 문성왕|문성왕]] 2)에 귀국하여 [[장흥 보림사|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형미|형미(逈微, 864-917)]] 등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의 한 선파(禪派)를 이루었다.<ref>김영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66 가지산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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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돌아온 [[도의]]는 당시 사람들이 선법(禪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으로 들어가 [[양양 진전사지|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제자인 [[염거|염거(廉居, ?-844)]]에게 법을 전했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억성사(億聖寺)]]에 오래 머물렀으며, [[체징|체징(體澄, 804-880)]]에게 법을 전했다. [[체징]]은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과 만났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 외에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신라 문성왕|문성왕]] 2)에 귀국하여 [[장흥 보림사|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형미|형미(逈微, 864-917)]] 등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의 한 선파(禪派)를 이루었다.<ref>김영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66 가지산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후 [[체징]]은 [[도의]]를 가지산문의 초조(初祖)<ref>한 종(宗)을 처음 세운 승려.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5145&cid=50292&categoryId=50292 초조]",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로 삼고 [[염거]]를 이조(二祖)로, 그리고 자신이 스승의 법을 이어받은 삼조(三祖)임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ref>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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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체징]]은 [[도의]]를 가지산문의 초조(初祖)<ref>한 종(宗)을 처음 세운 승려.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5145&cid=50292&categoryId=50292 초조]",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로 삼았고 [[염거]]를 이조(二祖)로, 그리고 그들의 법을 이어받은 자신이 삼조(三祖)임을 대내외에 공표했다.<ref>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2쪽.</ref>
  
이와 같이 가지산에 [[장흥 보림사|보림사]]를 연 것은 [[체징]]이었으나, [[체징]]이 [[도의]]의 법을 이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지산문을 처음 연 개산조(開山祖)를 [[도의]]로 규정한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선종|선종(禪宗)]]을 제일 먼저 전해왔기 때문에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고 이해한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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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에 [[장흥 보림사|보림사]]를 연 것은 [[체징]]이었으나, [[체징]]이 [[도의]]의 법을 이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지산문을 처음 연 개산조(開山祖)를 [[도의]]로 규정한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선종|선종(禪宗)]]을 제일 먼저 전해왔기 때문에 [[구산선문]]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고 이해한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5쪽.</ref>
  
 
[[도의]]-[[염거]]-[[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지는 과정은 [[체징]]의 탑비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의]]-[[염거]]-[[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지는 과정은 [[체징]]의 탑비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Blockquote|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Blockquote|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출처=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출처=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이 종파는 고려 말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일연|일연(一然, 1206-1289)]]도 그 중의 하나이다.<ref>김영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66 가지산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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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파는 고려 말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삼국유사|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일연(一然, 1206-1289)]]도 그 중의 하나다.<ref>김영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66 가지산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후원세력===
 
===후원세력===
가지산문의 성립과 발전에는 중앙의 지배세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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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문의 성립과 발전에는 중앙 지배세력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ref>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7쪽.</ref>  
  
[[체징|체징(體澄)]]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던 시기, 신라 제47대 임금인 [[신라 헌안왕|헌안왕]]이 [[체징]]의 명성을 접하고 왕경(王京)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이 이를 사양하자 [[헌안왕]]은 [[체징]]에게 [[장흥 보림사|장흥 보림사(寶林寺)]]에 머물 것을 청하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체징]]은 가지산문을 활짝 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ref>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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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징|체징(體澄)]]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던 , 신라 제47대 임금인 [[신라 헌안왕|헌안왕]]이 [[체징]]의 명성을 접하고 왕경(王京)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이 이를 사양하자 [[헌안왕]]은 [[체징]]에게 [[장흥 보림사|장흥 보림사(寶林寺)]]에 머물 것을 청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체징]]은 가지산문을 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ref>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1쪽.</ref>
  
장사현(長沙縣)의 부수(副守)를 지낸<ref>장사현은 지금 보림사가 있는 장흥의 옛이름이다. 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 2001년 9월호.</ref> [[김언경|김언경(金彦卿)]]은 [[체징]]의 재가제자(在家弟子)<ref>출가하지 않은 제자.</ref>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奉獻)하는 등 가지산문을 후원하는 데 크게 힘썼다.<ref>김동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785 김언경]",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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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현(長沙縣)의 부수(副守)를 지낸<ref>장사현은 지금 보림사가 있는 장흥의 옛이름이다. 최완수,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1253/1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 2001년 9월호.</ref> [[김언경|김언경(金彦卿)]]은 [[체징]]의 재가제자(在家弟子)<ref>출가하지 않은 제자.</ref>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하는 등 가지산문을 후원하는 데 크게 힘썼다.<ref>김동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785 김언경]",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장흥 보림사|보림사]]의 원래 이름은 '가지산사(迦智山寺)'였는데, [[체징]]이 입적한 후 왕실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본래 '보림사'는 중국 선종 제6조인 [[혜능|혜능(慧能, 638-713)]]이 머물면서 선을 꽃피우던 중국 [[남종선|남종선(南宗禪)]]의 총본산이었다. [[장흥 보림사]]가 [[혜능]]의 [[남종선]]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뜻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린 것이며, 이로 인해 가지산문과 그 본사(本寺)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ref>김영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66 가지산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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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흥 보림사|보림사]]의 원래 이름은 '가지산사(迦智山寺)'였는데, [[체징]]이 입적한 후 왕실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본래 '보림사'는 중국 선종 제6조인 [[혜능|혜능(慧能, 638-713)]]이 머물면서 선을 꽃피우던 중국 [[남종선|남종선(南宗禪)]]의 총본산이었다. [[장흥 보림사]]가 [[혜능]]의 [[남종선]]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뜻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가지산문과 그 본사(本寺)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ref>김영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366 가지산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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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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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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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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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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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승탑/작성중]]
 

2024년 3월 29일 (금) 09:45 기준 최신판

가지산문
(迦智山門)
대표명칭 가지산문
한자표기 迦智山門
이칭 가지산선문(迦智山禪門), 가지산파(迦智山派)
관련개념 구산선문(九山禪門)



정의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 중 하나.

내용

형성과 전개

당나라에 유학하며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은 도의(道義, ?-?)는 821년(헌덕왕 13) 무렵 귀국하여 신라 최초의 선종(禪宗)산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다.[1]

신라에 돌아온 도의는 당시 사람들이 선법(禪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으로 들어가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제자인 염거(廉居, ?-844)에게 법을 전했다.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億聖寺)에 오래 머물렀으며, 체징(體澄, 804-880)에게 법을 전했다. 체징은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과 만났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 외에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문성왕 2)에 귀국하여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형미(逈微, 864-917) 등 8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가지산의 한 선파(禪派)를 이루었다.[2]

이후 체징도의를 가지산문의 초조(初祖)[3]로 삼았고 염거를 이조(二祖)로, 그리고 그들의 법을 이어받은 자신이 삼조(三祖)임을 대내외에 공표했다.[4]

가지산에 보림사를 연 것은 체징이었으나, 체징도의의 법을 이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가지산문을 처음 연 개산조(開山祖)를 도의로 규정한다. 또한 도의가 신라에 선종(禪宗)을 제일 먼저 전해왔기 때문에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이 최초로 성립되었다고 이해한다.[5]

도의-염거-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지는 과정은 체징의 탑비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이 종파는 고려 말까지 명맥을 유지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인 일연(一然, 1206-1289)도 그 중의 하나다.[6]

후원세력

가지산문의 성립과 발전에는 중앙 지배세력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7]

체징(體澄)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의 황학난야(黃壑蘭若)에 머무르던 때, 신라 제47대 임금인 헌안왕체징의 명성을 접하고 왕경(王京)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이 이를 사양하자 헌안왕체징에게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머물 것을 청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체징은 가지산문을 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8]

장사현(長沙縣)의 부수(副守)를 지낸[9] 김언경(金彦卿)체징의 재가제자(在家弟子)[10]가 되어 사재(私財)로 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 한 구를 만들어 봉헌하는 등 가지산문을 후원하는 데 크게 힘썼다.[11]

또한 보림사의 원래 이름은 '가지산사(迦智山寺)'였는데, 체징이 입적한 후 왕실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본래 '보림사'는 중국 선종 제6조인 혜능(慧能, 638-713)이 머물면서 선을 꽃피우던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총본산이었다. 장흥 보림사혜능남종선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뜻에서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가지산문과 그 본사(本寺)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12][13]

지식관계망

  • 가지산문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구산선문 가지산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가지산문 도의 A는 B가 개창하였다 A ekc:founder B
가지산문 체징 A는 B가 중창하였다 A ekc:renovator B
도일(중국) 지장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지장 도의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의 염거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염거 체징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체징 형미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도의 양양 진전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염거 억성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체징 장흥 보림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도의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염거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체징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 체징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체징 신라 헌안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가지산문 장흥 보림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동제염거화상탑지 염거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mentions B
김언경 가지산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784년 도의가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남.
821년 도의가 구법여행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함.
860년 체징가지산사에 주석함.
861년 체징장흥 보림사를 창건함.
880년 체징장흥 보림사에서 입적함.

주석

  1.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5쪽.
  2. 김영태, "가지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 종(宗)을 처음 세운 승려.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초조",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2쪽.
  5.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5쪽.
  6. 김영태, "가지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7쪽.
  8. 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1쪽.
  9. 장사현은 지금 보림사가 있는 장흥의 옛이름이다.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 2001년 9월호.
  10. 출가하지 않은 제자.
  11. 김동수, "김언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김영태, "가지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52쪽.

참고문헌

  • 김두진, "선종구산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방용, 「려말 선초 사굴산문과 가지산문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사연구』 Vol.9, 한국종교사학회, 2001, 75-98쪽.
  • 김상영, 「고려시대 가지산문의 전개 양상과 불교사적 위상」, 『불교연구』 Vol.32, 한국불교연구원, 2010, 87-132쪽.
  • 김영태, "가지산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구산선문의 형성과 전개", 『한국 불교사 - 조계종사를 중심으로』, (주)조계종출판사, 2015, 83-99쪽.
  • 이계표, 「신라 하대의 가지산문」, 『역사학연구』 Vol.7, 전남사학회, 1993, 265-294쪽.
  • 이영호, 「신라 가지산문의 법통과 위상 인식」, 『신라문화』 Vol.32,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8, 271-297쪽.
  • 이일야, "가지산문", 『해주에서 장흥까지 아홉개의 산문이 열리다』, (주)조계종출판사, 2016, 33-59쪽.
  • 조범환, 「신라 하대 체징 선사와 가지산문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24쪽.
  • 최선희, 「체징과 가지산문 개창」, 『역사학연구』 Vol.25, 호남사학회, 2005, 1-27쪽.
  • "가지산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