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청금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2번째 줄: 12번째 줄:
  
 
=='''정의'''==
 
=='''정의'''==
조선시대 유생복, 유학생(儒學生)의 옷이다.<ref>[http://dic-costumekorea.org/meta/?act=detail&meta_uid=79 한국복식사전:청금복]</ref>
+
조선시대 [[유생]]이나 [[성균관]] 학생의 옷이다.<ref>"[http://dic-costumekorea.org/meta/?act=detail&meta_uid=79 청금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복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복식학회.</ref>
  
 
=='''내용'''==
 
=='''내용'''==
===기원===
+
[[시경|『시경(詩經)』]]의 "청청자금(靑靑子衿), 푸른 옷깃의 그대여"라는 시구<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67351&cid=41748&categoryId=41752 청금]", 한시어사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의 첫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각주에 '금(衿)''영(領)'으로 '옷깃'이다. [[성균관]]의 학생복인 '청금(靑衿)'이라는 명칭은 당(唐)에서 전래된 것으로 국학(國學)의 학생복인 [[청금복|청금복(靑衿服)]]에서 유래되었으며, 복식 형태는 명(明) [[국자감]]의 '청원령(靑圓領)'<ref>『太宗實錄』 11년(1411년) 6월 12일: 「成均館及五部儒生, 始着靑衿. 依朝廷之制也.」</ref>에 기인하였다.<ref>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80쪽.</ref> [[왕세자]], [[왕세손]]은 [[입학례]] 과정 중에 [[성균관 대성전|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에서 [[묘묘 작헌례|작헌의(爵獻儀)]]를 행할 때 [[왕세자의 상복]]인 [[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ref>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90~91쪽.</ref> 1485년 [[경국대전|『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성균관]] 제학생도 학생복의 기본 구성은 [[복건]] 형태의 '연건후수(軟巾後垂)'에 청금단령(靑衿團領)이었다.<ref>『經國大典』 ,「禮典」, '儀章條', "諸學生徒 緇布巾(在學) 團領(儒學用 靑衿) 條兒."</ref> 그런데 청금단령이 하급 관리인 [[서리|서리(書吏)]]의 복장과 유사하여 착용을 기피하고 사복(私服)인 [[직령|직령(直領)]]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후반 직령과 [[도포|도포(道袍)]]의 착용이 혼재하다가 이후 [[도포]]로 정해진다. 18세기 풍속화와 〈왕세자 입학도〉 등에 유생의 복식이 [[직령]]과 [[도포]]로 그려져 있다. 1746년(영조 22) [[난삼|난삼(襴衫)]]을 여러 학생들이 [[문무과 방방의|방방의(放榜儀)]]에서 착용하는 복식으로 개정하여 학생복은 [[청금복]]과 [[난삼]]으로 나뉘어졌다. 1884년 [[고종]]의 [[갑신의제개혁]]의 후속 조치인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에서 유생의 재복(齋服)은 구제(舊制)를 유지하되 사복(私服)은 소매가 좁은 착수의(窄袖衣)로 규정하였다.<ref>정희정,「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242쪽.</ref>
『시경』의 "청청자금(靑靑子衿)" 즉, "푸른 옷깃의 그대여"라는 시구의 첫 문장에서 유래된 것이다. 각주에 금(衿)은 영(領) 즉 옷깃이라 한다. 성균관의 학생복인 청금(靑衿)이라는 명칭은 당(唐)에서 전래된 것으로 국학(國學)의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에서 유래되었으며, 복식 형태는 명(明) 국자감의 청원령(靑圓領)<ref>[http://sillok.history.go.kr/id/kca_11106012_003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6월 12일 신축 3번째기사:중국의 제도에 따라 성균관과 오부 유생들이 처음으로 청금을 입다]</ref>에서 기인 하였다.<ref>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80쪽.</ref>
 
  
===착용신분===
+
=='''지식 관계망'''==
성균관의 제학생도(諸學生徒), 오부(五部) 유생들이 입는 학생복이다.
+
===관계정보===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착용상황===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왕세자, 왕세손의 경우 [[왕세자입학례(王世子入學禮)|입학례]] 과정 중에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에서 [[작헌의(爵獻儀)]]를 행할 때 상복(常服)인 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 [[왕복의(往復儀)]], [[수폐의(脩幣儀)]], [[입학의(入學儀)]]에도 계속 착용하였다.<ref>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90~91쪽.</ref>
 
 
 
===변천과정===
 
1485년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성균관 제학생도 학생복의 기본 구성은 복건형태의 연건후수(軟巾後垂)에 청금단령(靑衿團領)이었다.<ref>『經國大典』 ,「禮典」, '儀章條', "諸學生徒 緇布巾(在學) 團領(儒學用 靑衿) 條兒."</ref>그리하여 하급 아전인 서리(書吏)의 의관과 유사하다고 하여 청금복 착용을 기피하게 되었다. 한편 관외에서는 사복(私服)인 [[직령(直領)]]을 착용하였으며, 18세기 후반 직령과 [[도포(道袍)]]의 착용이 혼재하다가 이후 도포로 고착화 되었다. 이는 18세기 풍속화와 [[왕세자입학도(王世子入學圖)|기록화]] 등에 그려진 유생의 직령과 도포의 착용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br/>
 
1746년(영조 22) 난삼(襴衫)을 생원진사방방의(生員進士放榜儀) 제생(諸生)들의 착용 복식으로 개정 하였다.(청금복과 난삼으로 이분화<ref>정희정(2016), 1788년 『춘관통고』에서 학생의 청금복과 방방의에서 착용하는 난삼이 공존하고 있어 청금복과 난삼은 다른 복제(服制)로 확인된다.</ref>)1884년 고종의 갑신의제개혁의 후속 조치인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에서 유생의 재복(齋服)은 구제(舊制)를 유지하되 사복(私服)은 착수의(窄袖衣)로 규정 하였다.<ref>정희정(2016)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ref>
 
<gallery>
 
파일:유생복.jpg|유생복.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한국복식사(유송옥)』, 276쪽.
 
</gallery>
 
 
 
=='''관련항목'''==
 
===문헌/회화 → 복식===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노드 || '''{{PAGENAME}}''' || A는 B를 보여준다 ||
 
 
|-
 
|-
| 노드 || '''{{PAGENAME}}''' || A는 B를 기록한다 ||
+
| [[왕세자]] || 청금복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
|}
+
| [[학생]] || 청금복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복식 → 복식===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PAGENAME}}''' || 노드 || A는 B의 부분이다 ||
 
 
|-
 
|-
|}
+
| [[유생]] || 청금복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인물 → 복식===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노드 || '''{{PAGENAME}}''' || A는 B를 착용한다 ||
 
 
|-
 
|-
 +
| 청금복 || [[연건후수]]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
  
===복식 → 기관===
+
===시간정보===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PAGENAME}}''' || 노드 || A는 B에서 제작한다 ||
 
|-
 
|}
 
  
===기관/소장처 → 복식===
+
===공간정보===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노드 || '''{{PAGENAME}}''' || A는 B를 소장한다 ||
 
|-
 
|}
 
  
=='''참고문헌'''==
+
=='''시각자료'''==
[http://www.ugyo.net/et/dict/dict_view.jsp?sActnMode=dict_actn&DICT_CODE=D001222&sFrstCode= 유교넷 유교용어사전:청금복(靑衿服)]
+
===갤러리===
 +
===영상===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
 +
=='''참고문헌'''==
 +
===인용 및 참조===
 +
* 강효진,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과 그 특징」, 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 손윤혜, 「조선후기 왕세자 입학례 복식 고증」,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 손윤혜ㆍ이은주, 「1817년 효명세자 입학례의 왕세자 복식 고증」, 『문화재』 46권 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
* 장재천, 「조선시대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韓國思想과 文化』 55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
* 홍나영, 「조선시대 儒生服飾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성균관 학생복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1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97.
 +
 +
===더 읽을거리===
 +
* "[http://www.ugyo.net/et/dict/dict_view.jsp?sActnMode=dict_actn&DICT_CODE=D001222&sFrstCode= 청금복]", 통합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유교넷』<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국학진흥원.
  
 
[[분류:궁중기록화]]
 
[[분류:궁중기록화]]
 
[[분류:복식]]
 
[[분류:복식]]

2017년 11월 14일 (화) 18:56 기준 최신판


청금복
(靑衿服)
유생복.jpg
대표명칭 청금복
한자표기 靑衿服
이칭별칭 청금(靑衿), 청금단령(靑衿團領), 청금원령(靑衿圓領), 청단령(靑團領), 청삼(靑衫)
구분 의복
착용신분 유생
착용성별 남성



정의

조선시대 유생이나 성균관 학생의 옷이다.[1]

내용

『시경(詩經)』의 "청청자금(靑靑子衿), 푸른 옷깃의 그대여"라는 시구[2]의 첫 문장에서 유래되었다. 각주에 '금(衿)'은 '영(領)'으로 '옷깃'이다. 성균관의 학생복인 '청금(靑衿)'이라는 명칭은 당(唐)에서 전래된 것으로 국학(國學)의 학생복인 청금복(靑衿服)에서 유래되었으며, 복식 형태는 명(明) 국자감의 '청원령(靑圓領)'[3]에 기인하였다.[4] 왕세자, 왕세손입학례 과정 중에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에서 작헌의(爵獻儀)를 행할 때 왕세자의 상복곤룡포를 벗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5] 1485년 『경국대전』에 명문화되어 있는 성균관 제학생도 학생복의 기본 구성은 복건 형태의 '연건후수(軟巾後垂)'에 청금단령(靑衿團領)이었다.[6] 그런데 청금단령이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의 복장과 유사하여 착용을 기피하고 사복(私服)인 직령(直領)을 착용하였다. 18세기 후반 직령과 도포(道袍)의 착용이 혼재하다가 이후 도포로 정해진다. 18세기 풍속화와 〈왕세자 입학도〉 등에 유생의 복식이 직령도포로 그려져 있다. 1746년(영조 22) 난삼(襴衫)을 여러 학생들이 방방의(放榜儀)에서 착용하는 복식으로 개정하여 학생복은 청금복난삼으로 나뉘어졌다. 1884년 고종갑신의제개혁의 후속 조치인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에서 유생의 재복(齋服)은 구제(舊制)를 유지하되 사복(私服)은 소매가 좁은 착수의(窄袖衣)로 규정하였다.[7]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세자 청금복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학생 청금복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유생 청금복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청금복 연건후수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청금복", 『한국복식사전』online, 한국복식학회.
  2. "청금", 한시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
  3. 『太宗實錄』 11년(1411년) 6월 12일: 「成均館及五部儒生, 始着靑衿. 依朝廷之制也.」
  4.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80쪽.
  5.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90~91쪽.
  6. 『經國大典』 ,「禮典」, '儀章條', "諸學生徒 緇布巾(在學) 團領(儒學用 靑衿) 條兒."
  7. 정희정,「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24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강효진, 「조선왕실의 왕세자 교육과 그 특징」, 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손윤혜, 「조선후기 왕세자 입학례 복식 고증」,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손윤혜ㆍ이은주, 「1817년 효명세자 입학례의 왕세자 복식 고증」, 『문화재』 46권 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 장재천, 「조선시대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韓國思想과 文化』 55권,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 정희정, 「조선시대 왕세자 입학례 절차와 복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 홍나영, 「조선시대 儒生服飾의 변천에 관한 연구 –성균관 학생복을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1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97.

더 읽을거리

  • "청금복", 통합검색, 『유교넷』online, 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