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서울 장의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련항목)
(지식 관계망)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23번째 줄: 23번째 줄:
  
 
=='''내용'''==
 
=='''내용'''==
 +
659년([[신라 무열왕|무열왕]] 6)에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춘랑(長春郎)과 파벌구(罷伐九)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다.<ref>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750 장의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
고려시대 1027년([[고려 현종|현종]] 18)에는 장의사와 인근 사찰에서 당시의 금령을 어기고 술을 주조하여 처벌되기도 했지만, [[고려 예종|예종]], [[고려 인종|인종]], [[고려 의종|의종]] 등 역대 왕들이 절에 행차하는 등 그 위상이 높았다.<ref>김용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72 장의사(藏義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관련항목===
+
 
 +
조선시대에는 [[조선 태조|태조]]가 정비(正妃)인 [[신의왕후|신의왕후(神懿王后)]]의 기신제(忌晨祭)를 이 절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뒤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 사세를 떨쳤다. [[조선 태종|태종]]의 첫 기재가 장의사에서 설행되었으며, [[조선 세종|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초재(初齋) 또한 장의사에서 열렸다. 1424년([[조선 세종|세종]] 6) [[조선 세종|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삼십육사|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장의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조선 세조|세조]]는 왕비와 함께 장의사에서 법회를 열었고, 성종대에도 왕실의 기재를 장의사에서 설행한 사례가 종종 보이며 홍문관 관원들의 [[독서당|독서당(讀書堂)]]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연산군대 초반에도 왕이 장의사에서 수륙재를 거행하고 절의 중수를 위해 군사를 보내는 등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생모의 복위 문제로 [[갑자사화|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면서 불교도 큰 타격을 입었다. 즉 도성 내 주요 사찰과 양종 도회소를 철폐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왕명에 따라 장의사는 비워졌고 불상도 삼각산의 절로 옮겨졌다. 이어 장의사 앞에 이궁(離宮)을 만들면서 화단 조성을 위해 장의사를 철거했다. 17세기에는 장의사 터에 총융청(摠戎廳)이 세워졌다.<ref>김용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72 장의사(藏義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관련 승려===
 +
====[[찬유]]====
 +
[[찬유|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890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4)에는 장의사에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
{{blockquote
 +
|22세 때 양주(楊州)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출처=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jsessionid=A111344D2D93C8B6A748F71C288CA48E?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탄문]]====
 +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은 [[신엄|신엄대덕(信嚴大德)]]이 장의사에서 『[[화엄경|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화엄경]]』을 수학하며 독송했다. 914년([[신라 신덕왕|신덕왕]] 3)에는 장의사에서 [[구족계|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ref>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3#none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ref>
 +
{{blockquote
 +
|대사는 신엄대덕(信嚴大德)이 장의산사(莊義山寺; 지금의 종로구 세검정 부근에 있던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한다는 말을 들었다. 명공(名公)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진불(眞佛)의 법손이 되기를 원하여 특별히 그 절로 찾아갔다. 겨우 제자가 되자마자 곧 『화엄경』을 독송하였는데, 1권을 하루에 외우는데 빠뜨려 남기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엄공(嚴公)이 그릇이라 여겨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옛 스승이 말하기를, '현명한 이는 하루에 30명의 사나이를 대적하고 뒤에 출발했으나 먼저 이른다'라고 했는데, 장차 이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으니, 과연 '정성을 다해 마음에 남기어 잃지 아니 한다'는 말과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공은 배나 되었다'라는 말을 징험한 것이다. 용수(龍樹)가 사람을 교화한 설법으로 바로 심전(心傳)을 얻게 되었으니, 부처가 도를 강론한 말씀이 어찌 눈과 귀를 수고롭히랴.
 +
 
 +
비록 그러하나 묘한 깨달음에는 오히려 율의(律儀)가 있는 것이니, 나이 15세에 드디어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
|출처=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5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plctId=PLCT00006043#none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
 
 +
=='''지식관계망'''==
 +
*'''서울 장의사와 관련 있는 원종대사 찬유의 지식관계망'''
 +
<html>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D015/monk_wonjong.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
 
 +
===관계정보===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36번째 줄: 65번째 줄:
 
|-
 
|-
 
| [[서울 장의사]] || [[황산벌싸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서울 장의사]] || [[황산벌싸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서울 장의사지]] || [[서울 장의사]] || A는 B의 터이다 || A edm:isRelatedTo B
 
|-
 
|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 [[서울 장의사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시각자료'''==
 
  
 
=='''주석'''==
 
=='''주석'''==
48번째 줄: 71번째 줄:
  
 
=='''참고문헌'''==
 
=='''참고문헌'''==
 +
*김상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8750 장의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용태,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372 장의사(藏義寺)]",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53번째 줄: 78번째 줄: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사찰]]  
 
[[분류:사찰]]  
[[분류:승탑/작성중]]
+
[[분류:승탑/교열완료!]]

2017년 11월 22일 (수) 11:52 기준 최신판

서울 장의사
(서울 藏義寺)
대표명칭 서울 장의사
한자 서울 藏義寺
이칭 장의사(莊義寺)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정의

서울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

내용

659년(무열왕 6)에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춘랑(長春郎)과 파벌구(罷伐九)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하였다.[1]

고려시대 1027년(현종 18)에는 장의사와 인근 사찰에서 당시의 금령을 어기고 술을 주조하여 처벌되기도 했지만, 예종, 인종, 의종 등 역대 왕들이 절에 행차하는 등 그 위상이 높았다.[2]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정비(正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의 기신제(忌晨祭)를 이 절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뒤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 사세를 떨쳤다. 태종의 첫 기재가 장의사에서 설행되었으며,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초재(初齋) 또한 장의사에서 열렸다.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장의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세조는 왕비와 함께 장의사에서 법회를 열었고, 성종대에도 왕실의 기재를 장의사에서 설행한 사례가 종종 보이며 홍문관 관원들의 독서당(讀書堂)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연산군대 초반에도 왕이 장의사에서 수륙재를 거행하고 절의 중수를 위해 군사를 보내는 등 매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생모의 복위 문제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면서 불교도 큰 타격을 입었다. 즉 도성 내 주요 사찰과 양종 도회소를 철폐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왕명에 따라 장의사는 비워졌고 불상도 삼각산의 절로 옮겨졌다. 이어 장의사 앞에 이궁(離宮)을 만들면서 화단 조성을 위해 장의사를 철거했다. 17세기에는 장의사 터에 총융청(摠戎廳)이 세워졌다.[3]

관련 승려

찬유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890년(진성여왕 4)에는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Quote-left.png 22세 때 양주(楊州)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탄문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은 신엄대덕(信嚴大德)이 장의사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화엄경』을 수학하며 독송했다. 914년(신덕왕 3)에는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4]

Quote-left.png 대사는 신엄대덕(信嚴大德)이 장의산사(莊義山寺; 지금의 종로구 세검정 부근에 있던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한다는 말을 들었다. 명공(名公)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진불(眞佛)의 법손이 되기를 원하여 특별히 그 절로 찾아갔다. 겨우 제자가 되자마자 곧 『화엄경』을 독송하였는데, 1권을 하루에 외우는데 빠뜨려 남기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엄공(嚴公)이 그릇이라 여겨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옛 스승이 말하기를, '현명한 이는 하루에 30명의 사나이를 대적하고 뒤에 출발했으나 먼저 이른다'라고 했는데, 장차 이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였으니, 과연 '정성을 다해 마음에 남기어 잃지 아니 한다'는 말과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공은 배나 되었다'라는 말을 징험한 것이다. 용수(龍樹)가 사람을 교화한 설법으로 바로 심전(心傳)을 얻게 되었으니, 부처가 도를 강론한 말씀이 어찌 눈과 귀를 수고롭히랴.

비록 그러하나 묘한 깨달음에는 오히려 율의(律儀)가 있는 것이니, 나이 15세에 드디어 장의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2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지식관계망

  • 서울 장의사와 관련 있는 원종대사 찬유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찬유 서울 장의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탄문 서울 장의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삼십육사 서울 장의사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서울 장의사 황산벌싸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김상현, "장의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용태, "장의사(藏義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용태, "장의사(藏義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임세권, 이우태,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1: 고려5 비문5",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참고문헌

  • 김상현, "장의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용태, "장의사(藏義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