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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청사는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으며, 이후 [[고려 충선왕|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옛 가람의 일부를 중창하고 진감국사(眞鑑國師)를 주지로 역임하게 하였으며, 도감(都監)을 두어 무너진 당우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언제 폐사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532 국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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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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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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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이지관,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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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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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532 국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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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7562&cid=40942&categoryId=31548 국청사]",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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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 23:18 기준 최신판

개성 국청사
(開城 國淸寺)
대표명칭 개성 국청사
한자 開城 國淸寺



정의

경기 개풍군 중서면 여릉리에 있었던 사찰.

내용

고려 문종의 비인 인예태후(仁睿太后)의 발원으로 1089년(선종 6)에 창건하여 1097(숙종 2)에 완공되었다. 인예태후의 원찰(願刹)이었으며, 천태종(天台宗)의 기반이 되는 사찰로 의천(義天)은 이곳에서 천태교학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1] 1104년(숙종 9) 인예태후의 발원으로 조성된 황금 13층 석탑이 이곳에 봉안되었는데, 이 탑은 흥왕사(興王寺)의 금탑과 함께 고려왕실의 치탑사례(治塔事例)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다.[2]

고려 의종 대에는 도선국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는 1172년(명종 2)에 옥룡사로 이전되었다.[3]

그러나 국청사는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렸으며, 이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옛 가람의 일부를 중창하고 진감국사(眞鑑國師)를 주지로 역임하게 하였으며, 도감(都監)을 두어 무너진 당우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언제 폐사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4]

관련승려

의천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은 국청사의 최초 주지가 되어 이곳에 주석하면서 처음으로 천태학을 강설했다.[5]

Quote-left.png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04-205쪽.


덕소

원각국사 덕소(圓覺國師 德素)는 9세 때 의천의 제자로 국청사에 있던 교웅(敎雄)에 의해 득도했고, 1132년(인조 10) 25세 때에는 국청사에서 천태 교학을 수학하면서 그해 10월에 국청사를 찾은 인종을 만나기도 했다.[6]

Quote-left.png 어떤 스님이 이르기를 “저는 국청사(國淸寺) 정원(淨源)입니다”라 하므로, 스님은 기꺼이 그와 더불어 대화하니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아는 구면과 같았다. 드디어 따라가서 교웅대선사(敎雄大禪師)의 문하에 던져 9살 때 삭발하고 득도하였다. 웅공(雄公)이 항상 이르기를 “나의 종지(宗旨)를 중흥할 자는 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락) 즉(則). 반드시 스님과 함께 유희하였는데, 어느날 함께 불전(佛殿)을 참관하다가 우연히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 경함을 열고 책을 빼내어 스님에게 주므로 스님은 문득 그 책을 받아 곧 능통(能通)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동 영국사 원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462쪽.


지식관계망

  • 개성 국청사에 주석했던 대각국사 의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개성 국청사 인예태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의천 개성 국청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교웅 개성 국청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덕소 개성 국청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비 개성 국청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주석

  1. "국청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김위석, "국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홍기승, "도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위석, "국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상현, 「의천의 천태종 개창 과정과 그 배경」,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284-285쪽.
  6. 박용진, 「義天의 天台宗 門徒와 그 思想傾向」, 『중앙사론』 24,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6, 16쪽.

참고문헌

  • 김위석, "국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국청사",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