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읍혈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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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표제는 ‘혜경궁읍혈록’, 권수제는 ‘읍혈녹’으로 모두 한글로 표기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가보로 보관할 만한 필적을 내려달라는 맏조카 [[홍수영]](洪守榮, 1755~1798)의 부탁에 화답해 지은 것이라 한다. ‘읍혈록(泣血錄)’이란 제목은 [[정조]]가 이 책을 읽고 피눈물을 흘린 것을 본 [[혜경궁 홍씨]]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중록』, 『한중만록』으로 불리기도 한다. [[효의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에게 전해지다가 1830년(순조30) 화재로 없어졌는데, 영성위(永城尉) [[신광유]](申光綏)의 집에서 발견되어 다시 대궐로 들여와 보관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혜경궁 홍씨]]의 탄생부터 세자빈 간택,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 등 주요 사건을 시간에 따라 기술했고,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의 [[봉수당]]에서 잔치를 연 일로 서술을 끝맺었다. 후반부에는 일가친척에 대한 신상을 개별적으로 서술했는데, 가족뿐 아니라 입궐할 때 데리고 온 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아사미문고]]에 있는 국한문본 『보장(寶藏)』 1책, 한글본 『보장(寶藏)』 1책과 모두 동일하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기록 말미에 “자세한 내용은 『한듕만록』에 있다.”라는 서술이 있어 특기할 만하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32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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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읍혈록』 의 구성 방식=== | ||
+ | 『읍혈록』은 저술 후 여러 차례 필사되어 전해져왔는데 이본이 무려 14가지이다. 각 이본마다 제목과 구성 방식에 차이를 보인다. 제목은 ‘한중록’, ‘읍혈록’, ‘한중만록’, ‘보장’ 등으로 읍혈록에는 실려 있지 않은 권수가 한중만록에는 실려 있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중록의 저술 순서는 권수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1권-4권, 2권-3권, 5권-6권 순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자칫 저술 순서를 헷갈리기가 쉽다. 『읍혈록』은 일반적으로 저술 시기와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노년으로 이뤄진 1, 4권의 회고 부분, 둘째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임오화변을 자세히 기록한 2, 3권, 셋째는 친정의 신원(伸寃)을 위해 사건의 전말을 상술하였으며, 정조의 말을 적고 정조의 효성에 대해 기록한 5, 6권이다. <ref>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ref> | ||
− | === | + | ===담담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 |
− | + | 1권과 4권은 혜경궁 회갑년에 장조카 [[홍수영]]이 혜경궁의 필적이 집안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한 글자 적어달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쓴 회고록이다. 혜경궁이 태어나서부터 글을 쓰기까지 겪었던 일들을 시간 순으로 적어나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뒷부분에서 자기와 가까운 친인척 심지어 자기가 데리고 있었던 종에 대해서까지 절을 나누어 적고 있다. 이 글은 글 자체가 어떤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비교적 담담히 자신의 인생을 술회하고 있다. 당시는 이미 남편이 죽은 지 삼십 년이 지난 시기로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 불어 닥친 혜경궁 친정의 화변이 서서히 진정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정조가 친정아버지 [[홍봉한]]의 문집을 만들고 있었고 [[홍수영]] 등 친정 조카들에게는 벼슬을 내려주었으며 혜경궁의 유일한 여동생 [[이복일]] 처의 시집을 신원시켜 주기도 하였다. | |
+ | 더욱이 정조는 혜경궁에게 순조가 열다섯 살 성인이 되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화성으로 가서 상왕으로서 외가의 억울함을 모두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정순왕후]]가 영조의 후비로 들어온 이래 정순왕후 친정이 줄곧 날을 세우고 대립하였지만 이때는 정순왕후 친정마저 거의 세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일찍이 죽었고 정순왕후의 오빠로 혜경궁 친정 공격에 앞장을 섰던 [[김귀주]]도 정조 즉위 직후 흑산도로 귀양을 가서 1786년에 죽었다. 조정에는 혜경궁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지은 것이므로 혜경궁은 비교적 담담히 자기 일생을 회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3-4쪽.</ref> | ||
+ | ===사도세자를 둘러싼 논란에 대하여=== | ||
+ | 2권과 3권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일의 경과를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세세히 그려나갔다. 항간에, 사도세자가 죄가 있어서 죽었다는 설과 반대로 죄가 없는데도 신하들이 부추겨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등 논란이 많았는데 두 가지의 이설을 모두 반박하기 위해 쓴 글이다. 사도세자에게 광증이 있었는지는 당시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광증이 없었는데도 죄 없이 죽었다면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또는 죽음을 그냥 보고만 있었던 신하들은 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당시 영의정이라는 국정 최고 책임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순왕후]] 치하에서 [[홍낙임 | 동생]]까지 역적으로 죽어나가는 극한의 상황을 겪은 터라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세세히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곧 손자인 [[순조]]가 등극할 때라도 더 이상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 일을 정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f>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4-5쪽.</ref> | ||
− | === | + | ===친정을 위한 변론=== |
− | + | 5권과 6권은 앞의 두 글과 달리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친정에 겨누어진 여러 혐의를 벗기기 위해 쓴 글이다. 친정의 무죄를 밝히는 데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아들 [[정조]]의 말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적대 세력의 잘못과 의견을 사실에 기초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 권은 기본적으로 [[김귀주]]·[[화완옹주]]·[[김종수]] 등 [[벽파]]인 적대 세력이 어떤 동기에서 어떻게 말을 꾸며 자기 친정에 죄를 씌웠는지 서술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주장에서 어떤 점이 옳지 않은지 가장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반박한 글이다. 예컨대 아버지 [[홍봉한]]에게는 영조에게 뒤주를 권해 들여와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했다는 혐의가 있었다. 혜경궁은 이에 정조의 하교를 들어, 아버지가 뒤주가 들어온 다음에야 궁궐로 들어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혐의를 벗고자 하였다. 작은아버지 [[홍인한]]의 이른바 [[삼불필지 사건]]이나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도와 연루되었다는 혐의 등도 관련 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5, 6권은 기본적으로 각각의 혐의에 대해 그것이 근거 없음을 증거에 입각하여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자서전이나 전기의 방식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지 않고 관련 인물에 따라 또 그가 관계된 주요 사건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ref>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6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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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혈록』의 의의=== | ===『읍혈록』의 의의=== | ||
− | + | 1권과 4권을 제외한 네 권은 정치적동기가 뚜렷하고 목적성이 강한 저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경궁의 문학적 소양은 『읍혈록』을 한국문학사의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읍혈록』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철저히 기록 자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 혜경궁이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사건의 이면과 혜경궁처럼 높은 지위에서 경험하게 된 인간의 이면을 폭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혜경궁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말까지 거침없이 표현한 저작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섬세한 사건 묘사와 날카롭고 자세한 심리 분석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여성문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ref>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6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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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 | **최성환, 「혜경궁의 처지와 『한중록』의 다면적 사실성」, 『조선시대역사학보』 vol. 74, 조선시대사학회, 2015 | + | ** 최성환, 「혜경궁의 처지와 『한중록』의 다면적 사실성」, 『조선시대역사학보』 vol. 74, 조선시대사학회, 2015. |
− | **최성환, 「『한중록』의 정치사적 이해」, 『歷史敎育』 vol. 115, 역사교육연구회, 2010 | + | ** 최성환, 「『한중록』의 정치사적 이해」, 『歷史敎育』 vol. 115, 역사교육연구회, 2010. |
− | **김재영, 「「한중록」 연구 : 혜경궁 홍씨의 대인관계와 내면의식을 중심으로 」,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3 | + | ** 김재영, 「「한중록」 연구 : 혜경궁 홍씨의 대인관계와 내면의식을 중심으로 」,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3.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 | [[분류:전시자료]] | + | [[분류:전시자료]] [[분류:문헌]] |
2017년 12월 9일 (토) 22:30 기준 최신판
혜경궁 읍혈록 | |
한자명칭 | 惠慶宮泣血錄 |
---|---|
영문명칭 | An autobiography of Hyegyeonggung Hong on her 60th birthday |
작자 | 혜경궁 홍씨 |
간행시기 | 1795년(정조19)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청구기호 | 古2157-1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6.5×23.7㎝ |
판본 | 필사본 |
수량 | 23권 3책 |
표기문자 | 한글 |
목차
정의
회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서술한 자서전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표제는 ‘혜경궁읍혈록’, 권수제는 ‘읍혈녹’으로 모두 한글로 표기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가보로 보관할 만한 필적을 내려달라는 맏조카 홍수영(洪守榮, 1755~1798)의 부탁에 화답해 지은 것이라 한다. ‘읍혈록(泣血錄)’이란 제목은 정조가 이 책을 읽고 피눈물을 흘린 것을 본 혜경궁 홍씨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중록』, 『한중만록』으로 불리기도 한다. 효의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에게 전해지다가 1830년(순조30) 화재로 없어졌는데, 영성위(永城尉) 신광유(申光綏)의 집에서 발견되어 다시 대궐로 들여와 보관되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혜경궁 홍씨의 탄생부터 세자빈 간택,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 등 주요 사건을 시간에 따라 기술했고,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의 봉수당에서 잔치를 연 일로 서술을 끝맺었다. 후반부에는 일가친척에 대한 신상을 개별적으로 서술했는데, 가족뿐 아니라 입궐할 때 데리고 온 종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아사미문고에 있는 국한문본 『보장(寶藏)』 1책, 한글본 『보장(寶藏)』 1책과 모두 동일하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기록 말미에 “자세한 내용은 『한듕만록』에 있다.”라는 서술이 있어 특기할 만하다. [1]
『읍혈록』 의 구성 방식
『읍혈록』은 저술 후 여러 차례 필사되어 전해져왔는데 이본이 무려 14가지이다. 각 이본마다 제목과 구성 방식에 차이를 보인다. 제목은 ‘한중록’, ‘읍혈록’, ‘한중만록’, ‘보장’ 등으로 읍혈록에는 실려 있지 않은 권수가 한중만록에는 실려 있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중록의 저술 순서는 권수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1권-4권, 2권-3권, 5권-6권 순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자칫 저술 순서를 헷갈리기가 쉽다. 『읍혈록』은 일반적으로 저술 시기와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노년으로 이뤄진 1, 4권의 회고 부분, 둘째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임오화변을 자세히 기록한 2, 3권, 셋째는 친정의 신원(伸寃)을 위해 사건의 전말을 상술하였으며, 정조의 말을 적고 정조의 효성에 대해 기록한 5, 6권이다. [2]
담담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
1권과 4권은 혜경궁 회갑년에 장조카 홍수영이 혜경궁의 필적이 집안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한 글자 적어달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쓴 회고록이다. 혜경궁이 태어나서부터 글을 쓰기까지 겪었던 일들을 시간 순으로 적어나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뒷부분에서 자기와 가까운 친인척 심지어 자기가 데리고 있었던 종에 대해서까지 절을 나누어 적고 있다. 이 글은 글 자체가 어떤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비교적 담담히 자신의 인생을 술회하고 있다. 당시는 이미 남편이 죽은 지 삼십 년이 지난 시기로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 불어 닥친 혜경궁 친정의 화변이 서서히 진정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정조가 친정아버지 홍봉한의 문집을 만들고 있었고 홍수영 등 친정 조카들에게는 벼슬을 내려주었으며 혜경궁의 유일한 여동생 이복일 처의 시집을 신원시켜 주기도 하였다. 더욱이 정조는 혜경궁에게 순조가 열다섯 살 성인이 되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화성으로 가서 상왕으로서 외가의 억울함을 모두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정순왕후가 영조의 후비로 들어온 이래 정순왕후 친정이 줄곧 날을 세우고 대립하였지만 이때는 정순왕후 친정마저 거의 세력을 잃은 상황이었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일찍이 죽었고 정순왕후의 오빠로 혜경궁 친정 공격에 앞장을 섰던 김귀주도 정조 즉위 직후 흑산도로 귀양을 가서 1786년에 죽었다. 조정에는 혜경궁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지은 것이므로 혜경궁은 비교적 담담히 자기 일생을 회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
사도세자를 둘러싼 논란에 대하여
2권과 3권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일의 경과를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세세히 그려나갔다. 항간에, 사도세자가 죄가 있어서 죽었다는 설과 반대로 죄가 없는데도 신하들이 부추겨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등 논란이 많았는데 두 가지의 이설을 모두 반박하기 위해 쓴 글이다. 사도세자에게 광증이 있었는지는 당시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광증이 없었는데도 죄 없이 죽었다면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또는 죽음을 그냥 보고만 있었던 신하들은 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당시 영의정이라는 국정 최고 책임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순왕후 치하에서 동생까지 역적으로 죽어나가는 극한의 상황을 겪은 터라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세세히 해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곧 손자인 순조가 등극할 때라도 더 이상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 일을 정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
친정을 위한 변론
5권과 6권은 앞의 두 글과 달리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친정에 겨누어진 여러 혐의를 벗기기 위해 쓴 글이다. 친정의 무죄를 밝히는 데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아들 정조의 말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적대 세력의 잘못과 의견을 사실에 기초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 권은 기본적으로 김귀주·화완옹주·김종수 등 벽파인 적대 세력이 어떤 동기에서 어떻게 말을 꾸며 자기 친정에 죄를 씌웠는지 서술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주장에서 어떤 점이 옳지 않은지 가장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반박한 글이다. 예컨대 아버지 홍봉한에게는 영조에게 뒤주를 권해 들여와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했다는 혐의가 있었다. 혜경궁은 이에 정조의 하교를 들어, 아버지가 뒤주가 들어온 다음에야 궁궐로 들어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혐의를 벗고자 하였다. 작은아버지 홍인한의 이른바 삼불필지 사건이나 동생 홍낙임이 천주교도와 연루되었다는 혐의 등도 관련 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혐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5, 6권은 기본적으로 각각의 혐의에 대해 그것이 근거 없음을 증거에 입각하여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자서전이나 전기의 방식처럼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지 않고 관련 인물에 따라 또 그가 관계된 주요 사건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5]
『읍혈록』의 의의
1권과 4권을 제외한 네 권은 정치적동기가 뚜렷하고 목적성이 강한 저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경궁의 문학적 소양은 『읍혈록』을 한국문학사의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읍혈록』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철저히 기록 자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 혜경궁이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사건의 이면과 혜경궁처럼 높은 지위에서 경험하게 된 인간의 이면을 폭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혜경궁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말까지 거침없이 표현한 저작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섬세한 사건 묘사와 날카롭고 자세한 심리 분석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여성문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6]
지식 관계망
- 혜경궁 읍혈록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혜경궁 읍혈록 | 혜경궁 홍씨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사도세자 | 혜경궁 홍씨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혜경궁 홍씨 | 정조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사도세자 | 정조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정조 | 순조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홍봉한 | 혜경궁 홍씨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홍봉한 | 홍낙임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홍봉한 | 홍낙인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홍봉한 | 이복일 처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홍낙인 | 홍수영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홍봉한 | 홍인한 | A는 형제 B가 있다 | A ekc:hasBrother B |
홍인한 | 삼불필지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혜경궁 읍혈록 | 정순왕후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김한구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김귀주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김종수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화완옹주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벽파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벽파 | 김한구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벽파 | 김귀주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벽파 | 김종수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혜경궁 읍혈록 | 삼불필지 사건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임오화변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혜경궁 읍혈록 | 사도세자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김한구 | 정순왕후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김한구 | 김귀주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혜경궁 읍혈록 | 신광유 | A는 B에게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혜경궁 읍혈록 | 국립중앙도서관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혜경궁 읍혈록 | 봉수당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혜경궁 읍혈록 |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정순왕후 | 사도세자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798년 | 혜경궁 홍씨가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혜경궁 읍혈록를 저술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97765 | 127.003674 | 국립중앙도서관에 혜경궁 읍혈록이 소장되어 있다. |
40.807271 | -73.961623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혜경궁 읍혈록이 소장되어 있다. |
37.281955 | 127.013001 | 화성행궁 봉수당에 혜경궁 읍혈록이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32쪽.
- ↑ 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 ↑ 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3-4쪽.
- ↑ 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4-5쪽.
- ↑ 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6쪽.
- ↑ 정병설, 「『한중록』의 신고찰」, 『古典文學硏究』 vol. 34, 한국고전문학회, 2008, 186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최성환, 「혜경궁의 처지와 『한중록』의 다면적 사실성」, 『조선시대역사학보』 vol. 74, 조선시대사학회, 2015.
- 최성환, 「『한중록』의 정치사적 이해」, 『歷史敎育』 vol. 115, 역사교육연구회, 2010.
- 김재영, 「「한중록」 연구 : 혜경궁 홍씨의 대인관계와 내면의식을 중심으로 」,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