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해례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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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세종 25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전체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에 [[훈민정음]] 본문을, 제2부에는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해례]]를,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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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세종 25)에 창제된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전체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에 [[훈민정음]] 본문을, 제2부에는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해례]]를,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실었다.
훈민정음은 ‘[[훈민정음 예의본|예의(例義)]]’와 ‘[[훈민정음 해례본|해례(解例)]]’ 로 나뉘는데, 창제 이유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훈민정음 예의본|예의]]는 [[조선 세종|세종]]이 직접 지었고,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해례]]는 [[집현전]] 학사들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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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훈민정음 예의본|예의(例義)]]’와 ‘[[훈민정음 해례본|해례(解例)]]’ 로 나뉜다. 창제 이유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훈민정음 예의본|예의]]는 [[조선 세종|세종]]이 직접 지었고,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해례]]는 [[집현전]] 학사들이 지었다.
서문을 포함한 [[훈민정음 예의본|예의]]는 복잡하지 않고 간략하여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 실려 있었다. 그러나 창제 원리가 담긴 해례 부분은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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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포함한 [[훈민정음 예의본|예의]]는 복잡하지 않고 간략하여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 실려 있었다. 그러나 창제 원리가 담긴 해례 부분은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8-21쪽.</REF>
  
 
===훈민정음의 편찬과 구성===
 
===훈민정음의 편찬과 구성===
1443년 [[조선 세종|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훈민정음]]의 기본 원리와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간행할 것이라 공표하였다.<ref>『세종실록』 권102, 세종25년(1443) 12월 30일(경술),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2030_002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후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의 내용 보충과 여러가지 연구를 걸쳐서,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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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조선 세종|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훈민정음]]의 기본 원리와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간행할 것이라 공표하였다.<ref>『세종실록』 권102, 세종25년(1443) 12월 30일(경술),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512030_002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후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이 내용을 보완하고 여러가지 연구 과정을 거쳐서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ref>『세종실록』 권113, 세종28년(1446) 9월 29일(갑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9029_004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 구조를 보면 전체는 33장이며 3부로 나뉜다.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수록했고, 제2부는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해례]]를 26장 51면에 실었다.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기록하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이라 명시하였다.
 
<ref>『세종실록』 권113, 세종28년(1446) 9월 29일(갑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809029_004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 구조를 보면 전체는 33장이며 3부로 나뉜다.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수록했고, 제2부는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해례]]를 26장 51면에 실었다.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기록하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이라 명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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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연원===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연원===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은 현재 실존하는 훈민정음 판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고(故) [[전형필]]이 이를 입수하고 [[전형필]]이 세운 [[간송미술관]]에 원본을 보관하게 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805 훈민정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REF> 라는 정도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 건국대 박종덕 교수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PAGENAME}}이 어떻게 유출되어 [[간송미술관]]에 전해졌는지 그 세세한 과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논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은 [[광산 김씨]] 문중의 종가 [[긍구당]]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당 문중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장인 [[김응수]] 몰래 {{PAGENAME}}을 빼내어 자신의 자택에 숨겼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승이었던 [[김태준]]과 친구 관계였던 [[황의돈]]을 통해 [[전형필]]을 소개받게 되었다. [[전형필]]은 이미 [[김태준]]을 통해 {{PAGENAME}}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 화폐 1만원의 가격으로 [[이용준]]을 통해 {{PAGENAME}}을 매입할 수 있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가격이 1천원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일반 집 값의 10배 액수로 {{PAGENAME}}을 구매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REF>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2006, p.171~19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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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은 현재 실존하는 훈민정음 판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고(故) [[전형필]]이 이를 입수하고 [[전형필]]이 세운 [[간송미술관]]에 원본을 보관하게 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805 훈민정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건국대 박종덕 교수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어떻게 유출되어 [[간송미술관]]에 전해졌는지 그 세세한 과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논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은 [[광산 김씨]] 문중의 종가 [[긍구당]]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당 문중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장인 [[김응수]] 몰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내어 자신의 자택에 숨겼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승이었던 [[김태준]]과 친구 관계였던 [[황의돈]]을 통해 [[전형필]]을 소개받게 되었다. [[전형필]]은 이미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 화폐 1만원의 가격으로 [[이용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매입할 수 있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가격이 1천원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일반 집 값의 10배 액수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매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REF>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한국어학회, 2006, p.171~192.</REF>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2007년 경북 상주에서 고서적 수집상 [[배익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집(경북 상주시 낙동면)을 수리하다가 상주본을 발견했다" 라고 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을 처음 외부에 공개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과 매우 유사하며 서문 4장과 뒷부분 한장이 유실 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에서 보이지 않았던 당시 연구자들의 주석이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익기]]가 국가를 상대로 1000억원 규모의 큰 돈을 요구하여 정부가 선뜻 매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골동품 수집상 [[조영훈]]이 말하기를, "7월26일 [[배익기|배씨]]가 가게에서 30만원을 주고 고서적 두 박스를 사가면서 나무궤짝 위에 놓여있던 상주본을 훔쳐갔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원 소유주라 주장하는 일이 발행하였다. 이로 인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기나긴 법정 공방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계속 되는 법정 공방 속에서 [[배익기]]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을 은밀히 감추어 버렸고, 그 결과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법정 싸움이 여론적 관심을 얻게 되자 [[검찰]]은 더욱 강도높은 수사를 진행하였고,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본래 두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경북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에 있는 [[광흥사]] 불상 안에 있었던 것으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검찰]]은 [[도굴꾼 서씨]]에게서 '1999년 [[광흥사]] 불상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 및 여러 고서적을 빼내어, 이것을 [[조영훈]]에게 500만원에 팔았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ref>황경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62123215&code=960201#csidx984e58c15817babb0e7d1e7a1636132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빈손’ 소유권만 국가에 귀속 ‘이상한 일’], "『경향신문』, 2012년 05월 06일자 기사."</ref> 이 진술을 토대로 [[검찰]]은 [[배익기]]를 고소하였고, [[배익기]] 집을 압수 수색하였으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영훈]]은 사망하였고, [[배익기]]는 무혐의로 풀려났다.<REF>김일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2181.html "1000억 주면 '훈민정음 상주본' 내놓겠다고?"],『한겨례』, 2015년 10월 09일자 기사.</REF>그 후 [[배익기]]는 조용히 지내다가, 자기가 상주시 국회의원이 되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며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그러나 사진 속 해례본은 불에 그을린 모습이었다. 배익기는 2015년 3월 집에서 화재가 발생해 상주본이 불에 그슬렸다고 말했다, 2017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낙마하였다.<ref>황정일, "[http://news.joins.com/article/21321636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 배익기씨, 국회의원 재선거 예비후보 등록], "『리셋 코리아』,  2017년 02월 28일자 기사.</ref><ref>이경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0/2017041001060.html?Dep0=twitter&d=2017041001060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한 배익기씨, 불에 탄 훈민정음 상주본 사진 공개], "『조선일보』, 2017년 04월 10일자 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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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2007년 경북 상주에서 고서적 수집상 [[배익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집(경북 상주시 낙동면)을 수리하다가 상주본을 발견했다" 라고 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을 처음 외부에 공개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과 매우 유사하며 서문 4장과 뒷부분 한장이 유실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보다 더 좋았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본]]에서 보이지 않았던 당시 연구자들의 주석이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익기]]가 국가를 상대로 1000억원 규모의 큰 돈을 요구하여 정부가 선뜻 매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골동품 수집상 [[조영훈]]이 "7월26일 [[배익기|배씨]]가 가게에서 30만원을 주고 고서적 두 박스를 사가면서 나무궤짝 위에 놓여있던 상주본을 훔쳐갔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원 소유주라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기나긴 법적 공방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계속 되는 소송 다툼 속에서 [[배익기]]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을 은밀히 감추어 버렸고, 그 결과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배익기]]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법정 싸움이 여론적 관심을 끌게 되자 [[검찰]]은 더욱 강도높은 수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은 본래 두 사람 중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경북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에 있는 [[광흥사]] 불상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도굴꾼 서씨]]에게서 '1999년 [[광흥사]] 불상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 및 여러 고서적을 빼내어, 이것을 [[조영훈]]에게 500만원에 팔았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ref>황경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62123215&code=960201#csidx984e58c15817babb0e7d1e7a1636132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빈손’ 소유권만 국가에 귀속 ‘이상한 일’]", 『경향신문』, 작성일: 2012년 05월 06일."</ref> 이 진술을 토대로 [[검찰]]은 [[배익기]]를 고소하였고, [[배익기]] 집을 압수 수색하였으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영훈]]은 사망하였고, [[배익기]]는 무혐의로 풀려났다.<REF>김일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2181.html "1000억 주면 '훈민정음 상주본' 내놓겠다고?"],『한겨례』, 작성일: 2015년 10월 09일.</REF>그 후 [[배익기]]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자기가 상주시 국회의원이 되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상주본]]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며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그런데 사진 속 해례본은 불에 그을린 모습이었다. 배익기는 2015년 3월 집에서 화재가 발생해 상주본이 불에 그슬렸다고 말했다. 그는 2017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낙마하였다.<ref>황정일, "[http://news.joins.com/article/21321636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 배익기씨, 국회의원 재선거 예비후보 등록]", 『리셋 코리아』,  작성일: 2017년 02월 28일.</ref><ref>이경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10/2017041001060.html?Dep0=twitter&d=2017041001060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한 배익기씨, 불에 탄 훈민정음 상주본 사진 공개]", 『조선일보』, 작성일: 2017년 04월 1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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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자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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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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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의 한글 창제와 서적 편찬에 관한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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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002/A002.htm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및 관련 사건들에 관한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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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210/A210.htm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그 시험작에 관한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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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007/A007.htm 월인석보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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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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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세종]]||[[훈민정음]]||A는 B를 창시했다||14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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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조선 세종]]||A는 B에 의해 창시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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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편찬]]||{{PAGENAME}}||A는 B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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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편찬]]||[[훈민정음 해례본]]||A는 B와 관련이 있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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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를 주관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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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를 주관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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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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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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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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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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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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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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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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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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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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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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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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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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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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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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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로]]||[[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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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로]]||[[훈민정음 해례본 편찬]]||A는 B에 참여하였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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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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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정인지]]||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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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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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신숙주]]||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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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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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성삼문]]||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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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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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최항]]||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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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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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박팽년]]||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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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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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강희안]]||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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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PAGENAME}}||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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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훈민정음]] 예의편||A는 B를 저술하였다||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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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훈]]||[[배익기]]||A는 B를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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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익기]]||[[조영훈]]||A는 B를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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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사]]||[[배익기]]||A는 B를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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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사]]||[[조영훈]]||A는 B를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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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준]]||{{PAGENAME}} 간송본||A는 B를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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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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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훈민정음_01_세종대왕의서문_1611468.jpg |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대왕의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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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훈민정음 해례본 07 비단과종이에싸여있는훈민정음.jpg | 훈민정음 - 비단과 종이에 싸여 있는 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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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한글팀 훈민정음 해례본 08 표지.jpg| 훈민정음 표지
파일:훈민정음_09_2014년_국보_동산_앱사진_2277761.jpg | 훈민정음 - 2014년 국보 동산 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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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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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논문
 
*논문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2006, p.17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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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한국어학회, 2006, 171-192쪽.
  
 
===유용한 정보===
 
===유용한 정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805 훈민정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805 훈민정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영조,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5655 "<훈민정음 원본> 출처, 안동 '긍구당가'로 밝혀져"], 『대자보』.
 
*김영조,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5655 "<훈민정음 원본> 출처, 안동 '긍구당가'로 밝혀져"], 『대자보』.
 
*"[http://hangeul.naver.com/hangeul 네이버 한글한글아름답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sup>online</sup></online></html>
 
*"[http://hangeul.naver.com/hangeul 네이버 한글한글아름답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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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분류: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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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전시자료]] [[분류:문헌]]
[[분류:전시자료]]
 

2017년 11월 30일 (목) 18:47 기준 최신판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팀 훈민정음 해례본 01 세종대왕의서문.jpg
한자명칭 訓民正音 解例本
영문명칭 Explanation and examples of Korean phonetics and phonology for the people
작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간행시기 1446년
소장처 간송미술관
문화재지정사항 국보 제70호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1997년 등재)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22.6×17.2㎝
판본 목판본
수량 1책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1446년(세종 25)에 창제된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해설한 책이다. 전체 33장을 3부로 나누어, 제1부에 훈민정음 본문을, 제2부에는 훈민정음 해례를,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실었다. 훈민정음은 ‘예의(例義)’와 ‘해례(解例)’ 로 나뉜다. 창제 이유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예의세종이 직접 지었고,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설명한 해례집현전 학사들이 지었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는 복잡하지 않고 간략하여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 실려 있었다. 그러나 창제 원리가 담긴 해례 부분은 존재가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1962년 12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1]

훈민정음의 편찬과 구성

1443년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훈민정음의 기본 원리와 개념을 소개하고, 이를 간행할 것이라 공표하였다.[2] 이후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이 내용을 보완하고 여러가지 연구 과정을 거쳐서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3] 그 구조를 보면 전체는 33장이며 3부로 나뉜다.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수록했고,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를 26장 51면에 실었다.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기록하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이라 명시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연원

간송본은 현재 실존하는 훈민정음 판본이다. 간송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1940년경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고(故) 전형필이 이를 입수하고 전형필이 세운 간송미술관에 원본을 보관하게 되었다."[4] 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건국대 박종덕 교수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어떻게 유출되어 간송미술관에 전해졌는지 그 세세한 과정이 알려지게 되었다. 해당 논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 간송본광산 김씨 문중의 종가 긍구당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당 문중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장인 김응수 몰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빼내어 자신의 자택에 숨겼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승이었던 김태준과 친구 관계였던 황의돈을 통해 전형필을 소개받게 되었다. 전형필은 이미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 화폐 1만원의 가격으로 이용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매입할 수 있었다. 당시 기와집 한 채 가격이 1천원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일반 집 값의 10배 액수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매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5]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건

상주본은 2007년 경북 상주에서 고서적 수집상 배익기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집(경북 상주시 낙동면)을 수리하다가 상주본을 발견했다" 라고 하면서 상주본을 처음 외부에 공개하였다. 상주본간송본과 매우 유사하며 서문 4장과 뒷부분 한장이 유실되었지만 보존 상태는 간송본보다 더 좋았다. 특히 간송본에서 보이지 않았던 당시 연구자들의 주석이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익기가 국가를 상대로 1000억원 규모의 큰 돈을 요구하여 정부가 선뜻 매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골동품 수집상 조영훈이 "7월26일 배씨가 가게에서 30만원을 주고 고서적 두 박스를 사가면서 나무궤짝 위에 놓여있던 상주본을 훔쳐갔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원 소유주라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상주본은 기나긴 법적 공방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계속 되는 소송 다툼 속에서 배익기상주본을 은밀히 감추어 버렸고, 그 결과 현재 상주본이 어디에 있는지 배익기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법정 싸움이 여론적 관심을 끌게 되자 검찰은 더욱 강도높은 수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상주본은 본래 두 사람 중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경북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에 있는 광흥사 불상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도굴꾼 서씨에게서 '1999년 광흥사 불상에서 상주본 및 여러 고서적을 빼내어, 이것을 조영훈에게 500만원에 팔았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 [6] 이 진술을 토대로 검찰배익기를 고소하였고, 배익기 집을 압수 수색하였으나 상주본은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조영훈은 사망하였고, 배익기는 무혐의로 풀려났다.[7]그 후 배익기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자기가 상주시 국회의원이 되면 상주본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며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그런데 사진 속 해례본은 불에 그을린 모습이었다. 배익기는 2015년 3월 집에서 화재가 발생해 상주본이 불에 그슬렸다고 말했다. 그는 2017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였으나 낙마하였다.[8][9]


연계 자원 보러 가기
세종어제훈민정음 (월인석보)


지식 관계망

  • 세종의 한글 창제와 서적 편찬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훈민정음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창시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집현전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를 주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정인지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신숙주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성삼문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최항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박팽년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강희안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선로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신숙주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성삼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최항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박팽년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강희안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이개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해례본 이선로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예의편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예의편 세종실록 A는 B에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훈민정음 예의편 훈민정음 언해본 A는 B에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훈민정음 언해본 월인석보 A는 B에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에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유출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미술관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간송미술관 전형필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긍구당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긍구당 광산 김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광산 김씨 김응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김응수 김남이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김남이 이용준 A는 B의 아내이다 A ekc:hasHusband B
이용준 김태준 A는 B의 제자이다 A ekc:hasMaster B
김태준 황의돈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황의돈 전형필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훈민정음 해례본 A는 B에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사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광흥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도굴꾼 서씨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조영훈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배익기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1446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행되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이 발견되었다
조선시대-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긍구당에 소장되었다
1940년-현재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간송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조선시대-1999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광흥사에 소장되었다
1999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도굴꾼 서씨가 소장하고 있었다
1999년-2007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조영훈이 소장하고 있었다
2007년-2017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배익기가 소장하고 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93845 126.996834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8-21쪽.
  2. 『세종실록』 권102, 세종25년(1443) 12월 30일(경술),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세종실록』 권113, 세종28년(1446) 9월 29일(갑오),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훈민정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5.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한국어학회, 2006, p.171~192.
  6. 황경상,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빈손’ 소유권만 국가에 귀속 ‘이상한 일’", 『경향신문』, 작성일: 2012년 05월 06일."
  7. 김일우, "1000억 주면 '훈민정음 상주본' 내놓겠다고?",『한겨례』, 작성일: 2015년 10월 09일.
  8. 황정일, "훈민정음 상주본 소장 배익기씨, 국회의원 재선거 예비후보 등록", 『리셋 코리아』, 작성일: 2017년 02월 28일.
  9. 이경민,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한 배익기씨, 불에 탄 훈민정음 상주본 사진 공개", 『조선일보』, 작성일: 2017년 04월 10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 과정 연구 -학계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학』권31, 한국어학회, 2006, 171-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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