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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충감의 성은 김씨(金氏), 호는 설봉(雪峰), 자는 절조(絶照)이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098 충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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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국사는 휘(諱)는 충감(沖鑑)이요, 자(字)는 절조(絶照)이며, 호는 설봉(雪峯)이다. | |
− | ==== | + | |출처=최연식 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80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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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 ===출가수행=== | ||
+ | 7세 때 부모의 명을 받고 [[남원 선원사|남원 선원사(禪源寺)]]에 출가하여 [[자오|자오국사(慈悟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1292년(충렬왕 18)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098 충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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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려서부터 이미 소식(素食)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유희를 하는데도 포백으로 가사(袈裟)를 만들어 불사(佛事)의 놀이를 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부모에게 명을 받고 선원사(禪源寺)에서 머리를 깎고는 자오국사(慈悟國師)에게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이 19세에 승과(僧科)를 보아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어느 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다시 저 시방(十方)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교리(淸靜敎理)를 항하사(恒河沙)같이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고만을 더할 것이다. | ||
+ | |출처=최연식 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80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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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유학=== | ===구법유학=== | ||
+ | 명예나 문자를 탐구하는 것보다는 도를 닦아 얻는 과보를 중시하여 각지를 다니면서 도를 구하다가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도행(道行)이 높은 철산(鐵山)의 [[소경|소경선사(紹瓊禪師)]]를 만난 뒤 함께 귀국하여 3년 동안 제자의 예로 모셨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098 충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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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비록 시방세계 부처님들의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많은 청정한 가르침을 모두 익힌다고 하여도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을 늘릴 뿐으로 어찌 무루과(無漏果 : 번뇌가 없는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를 닦음만 하겠는가’라 하고서 지금까지 공부하던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옷을 떨쳐 일어나 여러 지방으로 (깨달음을 구하여) 돌아다녔다. (중국의) 오초(吳楚 : 강남지방) 지역에 머물 때에 철산(鐵山) 소경(紹瓊) 선사의 도행이 대단히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서, 3년간 모시니 소경선사도 크게 기대하였다. | ||
+ | |출처=최연식 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80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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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뒤 [[용천사(龍泉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칙수백장청규|백장(百丈)의 선문청규(禪門淸規)]]를 취하여 이를 실행하였으며, 뒤에 [[남원 선원사]] 주지가 되어 15년 동안 크게 종지(宗旨)를 선양하였다. 1334년부터 [[부여 보광사|보광사(普光寺)]]에 머무르며 절을 중건하였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098 충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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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경선사가 중국으로 돌아감에 미쳐 스님은 용천사(龍泉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가 제정한 『선문청규(禪門淸規)』를 가지고 실행하였다. 그후 선원사에서 15년간 주지하면서 선문의 종지를 드날려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보광사로 온 것은 두 번째 사용된 지원(至元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35~1340년까지 사용) 2년(충숙왕 복위5, 1336)이었다. | ||
+ | |출처=최연식 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80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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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38년 8월 문인들에게 비를 세우거나 탑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부좌(跏趺坐)한 채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승랍 58세였다. 국사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원명(圓明)이다.<ref>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098 충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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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로부터 4년째 되는 해 8월 24일에 곧 입적하려 함에 문인들에게 비석과 탑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곧 목용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가부좌를 하고 반듯하게 앉았다. 소주(紹珠)가 앞으로 나와서 ‘스승께서는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스님은 ‘마지막의 하나를 붙이니 너희들은 나누어 갖도록 하라(末後一著汝等有分薦取)’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곧바로 돌아가시니 세상의 나이로는 65세이고, 승려로서의 나이는 58세이었다. 태어난 것은 첫 번째 지원(前至元 : 원나라 世祖의 연호, 1264~1294년까지 사용) 12년인 을해년(충렬왕 1, 1275) 초하루가 을유(乙酉)인 달의 신유(辛酉)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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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098 충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 *최연식 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480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 ||
+ | *"임천군", 『신증동국여지승람』 17.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9A_0180_010_0020_2000_003_XML 임천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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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 01:41 기준 최신판
충감(沖鑑) | |
대표명칭 | 충감 |
---|---|
한자 | 沖鑑 |
생몰년 | 1274년(원종 15)-1338년(충숙왕 복위 7) |
시호 | 원명(圓明) |
호 | 설봉(雪峰) |
휘 | 충감(冲鑑) |
탑호 | 원소(圓炤) |
자 | 절조(絶照) |
승탑비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충감의 성은 김씨(金氏), 호는 설봉(雪峰), 자는 절조(絶照)이다.[1]
국사는 휘(諱)는 충감(沖鑑)이요, 자(字)는 절조(絶照)이며, 호는 설봉(雪峯)이다. |
||
출처: 최연식 역,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출가수행
7세 때 부모의 명을 받고 남원 선원사(禪源寺)에 출가하여 자오국사(慈悟國師)의 제자가 되었다. 1292년(충렬왕 18)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2]
어려서부터 이미 소식(素食)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유희를 하는데도 포백으로 가사(袈裟)를 만들어 불사(佛事)의 놀이를 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부모에게 명을 받고 선원사(禪源寺)에서 머리를 깎고는 자오국사(慈悟國師)에게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이 19세에 승과(僧科)를 보아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어느 날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다시 저 시방(十方)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청정교리(淸靜敎理)를 항하사(恒河沙)같이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다만 스스로 노고만을 더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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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역,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구법유학
명예나 문자를 탐구하는 것보다는 도를 닦아 얻는 과보를 중시하여 각지를 다니면서 도를 구하다가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도행(道行)이 높은 철산(鐵山)의 소경선사(紹瓊禪師)를 만난 뒤 함께 귀국하여 3년 동안 제자의 예로 모셨다.[3]
어느 날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비록 시방세계 부처님들의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많은 청정한 가르침을 모두 익힌다고 하여도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을 늘릴 뿐으로 어찌 무루과(無漏果 : 번뇌가 없는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를 닦음만 하겠는가’라 하고서 지금까지 공부하던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옷을 떨쳐 일어나 여러 지방으로 (깨달음을 구하여) 돌아다녔다. (중국의) 오초(吳楚 : 강남지방) 지역에 머물 때에 철산(鐵山) 소경(紹瓊) 선사의 도행이 대단히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서, 3년간 모시니 소경선사도 크게 기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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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역,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귀국 및 활동
그 뒤 용천사(龍泉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백장(百丈)의 선문청규(禪門淸規)를 취하여 이를 실행하였으며, 뒤에 남원 선원사 주지가 되어 15년 동안 크게 종지(宗旨)를 선양하였다. 1334년부터 보광사(普光寺)에 머무르며 절을 중건하였다.[4]
소경선사가 중국으로 돌아감에 미쳐 스님은 용천사(龍泉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가 제정한 『선문청규(禪門淸規)』를 가지고 실행하였다. 그후 선원사에서 15년간 주지하면서 선문의 종지를 드날려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 보광사로 온 것은 두 번째 사용된 지원(至元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35~1340년까지 사용) 2년(충숙왕 복위5, 1336)이었다. |
||
출처: 최연식 역,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입적
1338년 8월 문인들에게 비를 세우거나 탑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부좌(跏趺坐)한 채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승랍 58세였다. 국사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원명(圓明)이다.[5]
그로부터 4년째 되는 해 8월 24일에 곧 입적하려 함에 문인들에게 비석과 탑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곧 목용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가부좌를 하고 반듯하게 앉았다. 소주(紹珠)가 앞으로 나와서 ‘스승께서는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스님은 ‘마지막의 하나를 붙이니 너희들은 나누어 갖도록 하라(末後一著汝等有分薦取)’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곧바로 돌아가시니 세상의 나이로는 65세이고, 승려로서의 나이는 58세이었다. 태어난 것은 첫 번째 지원(前至元 : 원나라 世祖의 연호, 1264~1294년까지 사용) 12년인 을해년(충렬왕 1, 1275) 초하루가 을유(乙酉)인 달의 신유(辛酉)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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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연식 역,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지식 관계망
- 원명국사 충감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충감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부여 보광사지 | A는 B에 있었다 | A edm:formerLocation B |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 국립부여박물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자오 | 충감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소경 | 충감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충감 | 남원 선원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충감 | 부여 보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충감 | 칙수백장청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박상국, "충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상국, "충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상국, "충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상국, "충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상국, "충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박상국, "충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최연식 역,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임천군", 『신증동국여지승람』 17. 온라인 참조: "임천군",
『한국고전종합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