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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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인물정보
|사진= 김정호초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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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joseon_mid_etc1.png
|사진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423 김정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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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대표명칭= 김정호
 
|대표명칭= 김정호
 
|한자표기= 金正浩
 
|한자표기= 金正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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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로, 가장 많은 지도를 제작하였고, 가장 많은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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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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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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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생애===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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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남아있는 기록을 모두 합해도 A4 용지 한 장 안팎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양이다. 김정호가 황해도 토산 출신이라든지, 도성 숭례문 밖의 만리재나 약현 부근에 살았다는 등의 일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생몰 연대, 본관, 신분, 고향, 주요 주거지, 가계 등에 대해 어느 것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br/>
 
  
==='''김정호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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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에 대한 기록===
첫째,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수록된 인물들의 신분을 통해서 김정호의 신분을 짐작할 있다. 이 책은 전기가 전해지지 않는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방면에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책으로, 여기에 수록된 김정호도 하층계급 출신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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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br/>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중 김정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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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ref>"유재건의...추정"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할 있는데, [[이향견문록]]은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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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편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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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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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을 통해 김정호는 [[최한기|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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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의) 벗 김정호는 나이가 동관(童冠)일 때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 곧 눈금선(方罫)을 그려 넣음에 어쩔 수 없이 물을 자르고 산을 끊었으며, 여러 고을을 흩어 놓아 진실로 표(表)를 보고 경계를 살피기가 어려웠다···(중간 생략)···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全幅)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이 정전(井田)을 구획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 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昭代)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曆算)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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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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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일본과의 [[강호도조약]],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의 책임자를 역임하였던 [[신헌]]의 [[금당초고|금당초고(琴堂初槁)]]』 서문에도 김정호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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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군(김정호)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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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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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펹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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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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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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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br/>
둘째, [[신헌]]의 [[대동방여도서|『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서문을 통해서도 김정호의 신분을 추측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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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있도록 하였다.<br/>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군백원(金君百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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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신헌]]은 자신보다 7-8세 연상인 김정호를 [[신헌]]은 김정호를 '김군백원(金君百源)'이라 칭하고 있는데, 같은 양반 출신이라면 김공(金公)이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명을 적지 않고 성과 자만을 적은 것도 신분적 차이 때문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정호는 [[신헌]]과는 다른 신분계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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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해 『[[오주연문장전산고|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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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최근에 김정호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청구도]]) 2권을 저술했다. 별도로 바둑판처럼 만들어 번호를 매기고, 고을의 경계를 그었다.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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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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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전후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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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의 [[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최한기]]가 쓴 [[청구도|〈청구도〉]] 제문(題文)을 보면, 김정호는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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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도지 저술====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여러 지도의 도법을 상호비교해서 [[청구도|<청구도>]]를 만들었다.(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
+
[[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호는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셋째, 김정호의 족보가 없다는 사실로도 그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다.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김정호는 봉산파로 분류되어 있는데 한국 전쟁으로 봉산파가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된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6.25동란과 관계없이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구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가정 형편은 빈한한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br/>
 
넷째, 『지구전후도』, 『수전전도』,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 『대동여지전도』에서 확인되듯이 판각에 뛰어난 각수(刻手)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평민의 장인 출신이라 볼 수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근자에 김정호라는 사람이 [[대동여지도]] 20권을 지었는데… 잠시 보았을 뿐인데도 환히 알 수 있게 되어 매우 편리하다. 그 착상이 선인들에 비하여 분명히 우수하고, 그 정밀함은 이만저만하지 않다. … 그의 지도와 지지는 꼭 세상에 전해져야 할 것이다.
 
 
 
 
 
 
 
 
 
 
 
 
 
=='''활동사항'''==
 
김정호는 국토정보를 효율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청구도 범례(靑邱圖凡例)」등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의 제작과 지리지의 편찬에서 정확성에도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용의 편리에 대한 고민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김정호의 업적을 시대별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834년(순조 34) 이전부터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문(詩文)·인물 등을 제외한 내용을 큰 글씨로 적고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여백이나 첨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교정·첨가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동여편고(東輿便攷)』 2책(1책 결본)을 편찬하였다. 1834년(순조 34)에는 [[청구도|『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고, 이어 1840년(헌종 6)대 후반까지 3차에 걸쳐 개정판 [[청구도|『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기본 정보의 차원에서 [[청구도|『청구도』]]는 [[해동여지도|『해동여지도』]]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가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경부터 영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동여도지|『동여도지』]]의 편찬을 시작하여 1844년(헌종 10)경에 완성하며, 이후 지속적인 교정과 첨가를 하다가 1861년(철종 12)에 서문을 작성하여 수록한다. 이어 1850년(철종 1) 전후로 대축척 고을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인 대영도서관 소장 [[동여도지|『동여도지』]] 3책(경기·강원·황해)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때부터 김정호는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청구도|『청구도』]]의 형식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첩의 제작을 시작하였다. 표지에는 『동여(東輿)』라고 기록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14첩이 그러한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이 지도첩에서 김정호는 [[청구도|『청구도』]]에 첨가된 통계와 지지 정보를 대폭 삭제하고 기호의 사용을 정교화 하였다.
 
 
 
대신 1853년(철종 4)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대축척 고을지도를 생략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도비지|『여도비지(輿圖備志)』]] 20책을 [[최성환|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기본 정보가 [[청구도|『청구도』]]와 상당히 달라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18첩을 제작하였다. 이어 1856년(철종 7)에서 1859년(철종 10) 사이에는 기본 내용을 완전히 개정한 필사본의 [[동여도|『동여도』]] 23첩을, 1861년(철종 12)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다. 또한 1864년(고종 1)에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을 교정하여 재간하였으며, 1861년(철종 12)부터 1866년(고종 3)경까지 [[대동지지|『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편찬하다 미완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김정호는 이외에도 보급용의 중형 낱장본 지도로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의 부탁을 받고 판각한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40년(헌종 6)대에는 한양 지도인 목판본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전통식과 서양식이 결합된 세계지도인 『여지전도(輿地全圖)』, 1860년(철종 11)대에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22첩이 너무 커서 한눈에 조선 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제작하였다.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기자 (고조선)|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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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도비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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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동여도지]]나 [[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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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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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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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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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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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E031/E031.htm 김정호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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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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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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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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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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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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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1834년(순조 34년) : 지지 [[동여도지|《동여도지》]] 제1차 편찬 / 지도 [[청구도|〈청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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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1년(철종 2년)부터 1856년(철종 7년) 사이 : 지지 [[여도비지|《여도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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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정호]]||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1856년(철종 7년)부터 1861년(철종 12년) 사이 : 지도 [[동여도|〈동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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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년(철종 12년) : 지도 [[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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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표준영정]] || [[김정호]]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1866년(고종 3년) : 지지 [[대동지지|《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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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전후도|〈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 [[최한기]]가 펴냈으며, 김정호가 판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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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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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청구도|〈청구도〉]]·[[동여도|〈동여도〉]]·[[대동여지도|〈대동여지도〉]][[동여도지|《동여도지》]]·[[여도비지|《여도비지》]]·[[대동지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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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도]] || [[청구도제]]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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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도제]] || [[최한기]] || A는 B가 썼다 || A dcterms:creator B
=='''노드 및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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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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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 || [[김정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노드 || 관계 || 클래스||노드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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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 || [[최한기]]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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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기]] || [[지구전후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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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전후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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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여도지]] ||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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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비지]] ||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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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도비지]] || [[최성환]]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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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 || [[김정호]]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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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 ||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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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isTheSubjectOf ||민족기록화||[[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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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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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사이언스]김정호의 꿈과 조선시대 지도체계(게시일: 2014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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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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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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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인용 및 참조===
 
#단행본
 
#단행본
#* 정민,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글항아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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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국립중앙도서관, 2011.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23300070001 한국문화콘텐츠닷컴 "김정호의 생애"], 2016년 12월 26일 확인
 
*[https://namu.wiki/w/%EA%B9%80%EC%A0%95%ED%98%B8 "김정호", 나무위키], 2016년 12월 26일 확인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0%95%ED%98%B8 "김정호", 위키백과], 2016년 12월 26일 확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423 "김정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6년 12월 26일 확인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400848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년.]
+
# 웹 자원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각주'''==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references/>
+
#*양보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08 여도비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장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추가자료'''==
 
  
[[분류:인물]][[분류:민족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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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분류:인물]]

2017년 11월 28일 (화) 13:36 기준 최신판


김정호(金正浩)
Joseon mid etc1.png
대표명칭 김정호
한자표기 金正浩
생몰년 1804년 추정-1866년 추정
본관 청도(淸道)
고산자(古山子)
백원(伯元)·백원(百源)·백온(伯溫)·백지(伯之)
출생지 황해도 토산(兎山)
시대 조선
국적 대한민국
대표저서 대동여지도
성격 지리학자, 실학자
유형 인물


정의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이다.

내용

가계와 생애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崔漢綺)(1803~1878)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1]

김정호에 대한 기록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청구도』에 수록된 최한기의 「청구도제(靑邱圖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수록된 「만국경위지구도변증설(萬國經緯地地球圖辨證說」과 「지지변증설(地志辨證說)」, 신헌의 『금당초고(琴堂初槁)』에 수록된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수록된 「김고산정호(金古山正浩)」에 불과하다.

  • 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2]할 수 있는데, 이향견문록은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Quote-left.png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공교한 재주가 많고 지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란하게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견줄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여길만했다. 또 <<동국여지도>> 10권을 편비했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유재건, 『이향견문록』, 글항아리, 2008.


Quote-left.png (나의) 벗 김정호는 나이가 동관(童冠)일 때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 곧 눈금선(方罫)을 그려 넣음에 어쩔 수 없이 물을 자르고 산을 끊었으며, 여러 고을을 흩어 놓아 진실로 표(表)를 보고 경계를 살피기가 어려웠다···(중간 생략)···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全幅)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가 된) 우왕이 정전(井田)을 구획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 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昭代)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曆算)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Quote-left.png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證定)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군(김정호)과 그것을 모의하고 완성시키도록 위촉하였다.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어 수십 년 걸려 비로소 한 부를 만들었는데 모두 23권이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활동과 업적

청구도 제작

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3]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김정호의 청구도에 대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Quote-left.png 최근에 김정호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도(청구도) 2권을 저술했다. 별도로 바둑판처럼 만들어 번호를 매기고, 고을의 경계를 그었다.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 Quote-right.png
출처: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지구전후도 제작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4]

동여도지 저술

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호는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5]

여도비지 제작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6] 조선 후기 읍지에서 강조되었던 인물, 시문과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지 않은 반면, 군사·경제적인 내용이 강조되었는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각 군현의 영역과 위치·위도·경도·군인수·경지면적·인구수·서울로부터의 거리 등을 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국 각 군현의 경도와 위도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책이다.[7] 동여도지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8]

대동여지도 제작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9]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10]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1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A ekc:depicts B
김정호 표준영정 김정호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청구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청구도 청구도제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청구도제 최한기 A는 B가 썼다 A dcterms:creator B
최한기 김정호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정희 최한기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최한기 지구전후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지구전후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동여도지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여도비지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여도비지 최성환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이향견문록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이향견문록 유재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오주연문장전산고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금당초고 김정호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금당초고 신헌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신헌 김정호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신헌 최한기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김정희 신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약용 신헌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약용 의순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신헌 의순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의순 김정희 A는 B와 교유하였다 A foaf:knows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34년 김정호청구도 2책을 편찬하였다
1834년 김정호지구전후도를 판각하였다
1834년-1845년 김정호동여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1850년-1856년 김정호최성환과 함께 여도비지 20책을 편찬하였다
1861년 김정호가 목판본 22첩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YTN 사이언스]김정호의 꿈과 조선시대 지도체계(게시일: 2014년 8월 10일)

  • [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주석

  1.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유재건의...추정" :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여도비지",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1.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2. "지구전후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홍시환, "청구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양보경, "여도비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장상훈, "대동여지도목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단행본
    • 국립중앙도서관,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국립중앙도서관, 2011.
  1.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