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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박성원(1697∼176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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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내용==
 
===생애 및 관직활동===
 
===생애 및 관직활동===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 호는 겸재(謙齋).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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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다. [[이재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조선 경종 원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70세이상 문관 정이품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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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조선 영조|영조]]의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을 위한 관서) 가입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나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조선 정조|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학술활동 및 저서===
 
===학술활동 및 저서===
 
====학술활동====
 
====학술활동====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되는 점을 들어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됨을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는 의도를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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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며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된다고 보고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고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호락논쟁|호락논쟁(湖洛論爭)]]에 관련해서는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하여 [[한원진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함으로써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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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저서====
박성원은 예서(禮書)의 연구에 적극적인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혹된 점을 일일이 초출하여 조목마다 그의 사견을 첨부하여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돈효록(敦孝錄)』·『보민록(保民錄)』·『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ref>이소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9479 충북대학교 박물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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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화동정음통석운고]]』를 저술하였다. 또한 예서(禮書)의 연구에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문점에 조목조목 의견을 달아 『[[예의유집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이 책은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 『[[돈효록|돈효록(敦孝錄)]]』,  『[[보민록|보민록(保民錄)]]』, 『[[돈녕록|돈녕록(敦寧錄)]]』, 『[[겸재집|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ref>이순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0793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화동정음통석운고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저술
 
영조 23년(1747)에 지은 것인데, 정조 11년(1787) 책머리에 정조가 정음통석서(正音通釋序)를 써서 간행시켰기 때문에 『정음통석(正音通釋)』이라고도 한다. 그밖에 이본이 몇 종류가 있다. 『삼운통고(三韻通考)』와 [[사성통해 |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의거하여 당시의 우리 나라와 중국의 한자음을 밝힌 운서다. 중국어 역관인 이언용(李彦容)이 많이 도왔다고 한다.<ref>이응백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네이버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9208&cid=41708&categoryId=41711 박성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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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김윤정, 「謙齋 朴聖源의 禮學과 『禮疑類輯』의 성격」, 『韓國文化』Vol.61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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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謙齋 朴聖源의 禮學과 『禮疑類輯』의 성격」, 『韓國文化』, Vol.61, No.-,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 103-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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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0:30 기준 최신판

박성원(朴聖源)
한글팀 일러 조선중년문관.png
대표명칭 박성원
한자표기 朴聖源
생몰년 1697-1767
본관 밀양(密陽)
겸재(謙齋)
사수(士洙)
대표저서 보민록, 겸재집, 화동정음통석운고
대표직함 지평, 세손강서원유선
유형 문신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내용

생애 및 관직활동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사수(士洙)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다.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조선 경종 원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28년(영조 4) 별시문과의 을과에 급제, 사간원정자(司諫院正字)·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의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을 위한 관서) 가입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나 2년 뒤 석방되었다. 세손강서원유선(世孫講書院諭善)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으며, 참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

학술활동 및 저서

학술활동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며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된다고 보고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려고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그의 저술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 관련해서는 그의 심성론은 스승인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하고 낙론(洛論)에 동조하였다.[2]

저서

1747년 『화동정음통석운고』를 저술하였다. 또한 예서(禮書)의 연구에 힘을 기울여 연구과정에서 의문점에 조목조목 의견을 달아 『예의유집(禮疑類輯)』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이 책은 후학들의 예서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밖에도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3]

지식 관계망

  • 화동정음통석운고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화동정음통석운고 박성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화동정음통석운고 사성통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화동정음통석운고 언문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재 박성원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이간 박성원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박성원 호락논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화동정음통석운고 삼운통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겸재집 박성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보민록 박성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주석

  1.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순두, "박성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윤정, 「謙齋 朴聖源의 禮學과 『禮疑類輯』의 성격」, 『韓國文化』, Vol.61, No.-,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 103-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