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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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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근대적 개혁운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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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과 정부군과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박정양(朴定陽)]]·[[김윤식|김윤식(金允植)]]·[[조희연|조희연(趙羲淵)]]등 21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뒤 개혁운동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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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박정양(朴定陽)]]·[[김윤식|김윤식(金允植)]]·[[조희연|조희연(趙羲淵)]]등 21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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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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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 주도하에 1894년 7월 27일부터 1894년 12월 17일까지 추진되었다.  [[군국기무처]]의 핵심인물들은 청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서양 및 일본의 문물을 모델로 하는 개화세력으로 반봉건적인 혁신적 개혁을 단행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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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개혁 또한 조선의 내각대신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개혁이었다. 특히, 내부대신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며 과감하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시행된 개혁안은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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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갑오개혁]]은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이 내각에서는 일본세력의 퇴조에 따라 [[박정양|박정양(朴定陽)]]을 위시한 친미·친로파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미우라|미우라[三浦梧樓]]] 공사는 일본세력의 퇴조를 만회하기 위해, 일으킨 [[을미사변]] 이후 그의 의도대로 [[김홍집내각]]의 친일적 성격은 강화되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김홍집내각]]은 계속 내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사후처리에 있어 [[김홍집내각]]이 보여준 친일적 성격과 [[단발령]] 실시는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국왕의 [[아관파천|아관파천(俄館播遷)]]이 단행됨으로써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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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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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9개월 동안 진행된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평가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정치적 개입에 의한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한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율적 개혁으로 보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볼 때, [[갑오개혁]]은 멀리 [[실학|실학(實學)]]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개혁요구 내지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반청·독립정신을 가진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나 청말(淸末)의 [[무술변법|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시의성(時宜性)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반일·반침략을 우선시켰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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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의 내용===
 
===[[갑오개혁]]의 내용===
 
====1차 [[갑오개혁]]====
 
====1차 [[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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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갑오개혁]]의 한계
 
*1차 [[갑오개혁]]의 한계
**[[군국기무처]] 회의원들은 내란을 기화로 우리 나라에 침투한 일본군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추진한 개혁사업에는 타율적인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일본인 고문관 및 군사교관의 초빙, 일본화폐의 조선내 유통권 허용, [[방곡령|방곡령(防穀令)]]의 반포금지조처 등이 그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반일운동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비도(匪徒)’로 규정하고 일본군과 합세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 [[김홍집]]·[[박영효|박영효(朴泳孝)]]의 연립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제1차개혁에 있어서 [[군국기무처]]의 혁신적인 개혁사업은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폐하는 대신 그의 적손자인 [[이준용|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한편, 동학농민군 및 청국군과 내통하여 일본군을 협격, 축출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정부는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이노우에[井上馨]]]를 조선주차특명전권공사(朝鮮駐箚特命全權公使)로 임명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노우에]]는 공사로 부임한 직후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시킴과 동시에,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망명정객 [[박영효]]와 [[서광범|서광범(徐光範)]]을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입각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배경으로 [[조선 고종|고종]]은 청나라와의 절연(絶緣), 국왕의 친정(親政)과 법령의 준수, 왕비와 종친의 정치간여 배제, 내정개혁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한 「[[홍범십사조|홍범십사조(洪範十四條)]]」를 반포하였다. 그 뒤 [[이노우에]] 공사는 내정개혁의 미명하에 다수의 일본인 고문관들을 기용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기도하였으나, 일본차관 도입의 지연과 [[삼국간섭|삼국간섭(三國干涉)]]에 따른 조선왕실의 [[거일인아책|거일인아책(拒日引俄策: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정책)]] 등이 크게 작용하여의 실패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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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기무처]] 회의원들은 내란을 기화로 우리 나라에 침투한 일본군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추진한 개혁사업에는 타율적인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일본인 고문관 및 군사교관의 초빙, 일본화폐의 조선내 유통권 허용, [[방곡령|방곡령(防穀令)]]의 반포금지조처 등이 그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반일운동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비도(匪徒)'로 규정하고 일본군과 합세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 [[김홍집]]·[[박영효|박영효(朴泳孝)]]의 연립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제1차개혁에 있어서 [[군국기무처]]의 혁신적인 개혁사업은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폐하는 대신 그의 적손자인 [[이준용|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한편, 동학농민군 및 청국군과 내통하여 일본군을 협격, 축출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정부는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이노우에[井上馨]]]를 조선주차특명전권공사(朝鮮駐箚特命全權公使)로 임명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노우에]]는 공사로 부임한 직후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시킴과 동시에,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망명정객 [[박영효]]와 [[서광범|서광범(徐光範)]]을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입각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배경으로 [[조선 고종|고종]]은 청나라와의 절연(絶緣), 국왕의 친정(親政)과 법령의 준수, 왕비와 종친의 정치간여 배제, 내정개혁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한 「[[홍범십사조|홍범십사조(洪範十四條)]]」를 반포하였다. 그 뒤 [[이노우에]] 공사는 내정개혁의 미명하에 다수의 일본인 고문관들을 기용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기도하였으나, 일본차관 도입의 지연과 [[삼국간섭|삼국간섭(三國干涉)]]에 따른 조선왕실의 [[거일인아책|거일인아책(拒日引俄策: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정책)]] 등이 크게 작용하여의 실패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차 [[갑오개혁]]====
 
====2차 [[갑오개혁]]====
제2차개혁 또한 조선의 내각대신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개혁이었다. 특히, 내부대신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며 과감하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었다. 우선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이 ‘내각(內閣)’과 ‘부(部)’로 각각 바뀌면서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이 [[농상공부|농상공부(農商工部)]]로 통합되어 모두 7부가 되었다. 내각은 각부 대신들로 구성된 합의제정책심의기관으로서 각종 법률칙령안, 세입 세출의 예산 및 결산, [[내외국채|내외국채(內外國債)]]에 관한 사항, 국제조약의 체결 등에 관한 국가의 중대사를 심의, 의결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내각과 분리된 궁내부의 관제는 대폭 간소화되었으며, 그 방계기관이었던 [[종정부|종정부(宗正府)]]와 [[종백부|종백부(宗伯府)]]는 폐지되었다. 중앙정부의 기구 개편과 더불어 지방제도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종래의 도(道)·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대소행정구역이 폐합되어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되었다.그리고 내부대신의 지휘·감독하에 각 부에는 관찰사(觀察使) 1명, 참서관(參書官)·경무관(警務官) 각 1명을, 군에는 군수 1명을 파견하여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었다. 아울러 전국 9개소에 [[탁지부]]대신 관할하의 [[관세사|관세사(管稅司)]]와 220개소의 [[징세서|징세서(徵稅署)]]를 설치하여 조세 및 기타 세입의 징세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밖에도 근대적인 군사 및 경찰제도확립을 위한 「[[군부관제|군부관제(軍部官制)]]」·「[[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訓鍊隊士官養成所官制)]]」·「[[경무청관제|경무청관제(警務廳官制)]]」 등이 제정되었고, 행정관이 장악하고 있던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로서 「[[재판소구성법|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과 「[[법관양성소규정|법관양성소규정(法官養成所規程)]]」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교육입국조칙|교육입국조칙(敎育立國詔勅)]]에 따라 「[[한성사범학교관제|한성사범학교관제(漢城師範學校官制)]]」및 「외국어학교관제|외국어학교관제」가 제정, 실시되는 한편, 114명의 양반출신 유학생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박영효]]의 지나친 독주는 그의 귀국과 입각을 주선하였던 일본측은 물론,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결국 음도불궤죄(陰圖不軌罪: 몰래 반역을 도모한 죄)의 혐의로 일본에 재차 망명해야만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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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개혁 또한 조선의 내각대신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개혁이었다. 특히, 내부대신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며 과감하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었다. 우선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이 '내각(內閣)'과 '부(部)'로 각각 바뀌면서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이 [[농상공부|농상공부(農商工部)]]로 통합되어 모두 7부가 되었다. 내각은 각부 대신들로 구성된 합의제정책심의기관으로서 각종 법률칙령안, 세입 세출의 예산 및 결산, [[내외국채|내외국채(內外國債)]]에 관한 사항, 국제조약의 체결 등에 관한 국가의 중대사를 심의, 의결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내각과 분리된 궁내부의 관제는 대폭 간소화되었으며, 그 방계기관이었던 [[종정부|종정부(宗正府)]]와 [[종백부|종백부(宗伯府)]]는 폐지되었다. 중앙정부의 기구 개편과 더불어 지방제도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종래의 도(道)·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대소행정구역이 폐합되어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되었다.그리고 내부대신의 지휘·감독하에 각 부에는 관찰사(觀察使) 1명, 참서관(參書官)·경무관(警務官) 각 1명을, 군에는 군수 1명을 파견하여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었다. 아울러 전국 9개소에 [[탁지부]]대신 관할하의 [[관세사|관세사(管稅司)]]와 220개소의 [[징세서|징세서(徵稅署)]]를 설치하여 조세 및 기타 세입의 징세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밖에도 근대적인 군사 및 경찰제도확립을 위한 「[[군부관제|군부관제(軍部官制)]]」·「[[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訓鍊隊士官養成所官制)]]」·「[[경무청관제|경무청관제(警務廳官制)]]」 등이 제정되었고, 행정관이 장악하고 있던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로서 「[[재판소구성법|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과 「[[법관양성소규정|법관양성소규정(法官養成所規程)]]」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교육입국조칙|교육입국조칙(敎育立國詔勅)]]에 따라 「[[한성사범학교관제|한성사범학교관제(漢城師範學校官制)]]」및 「외국어학교관제|외국어학교관제」가 제정, 실시되는 한편, 114명의 양반출신 유학생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박영효]]의 지나친 독주는 그의 귀국과 입각을 주선하였던 일본측은 물론,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결국 음도불궤죄(陰圖不軌罪: 몰래 반역을 도모한 죄)의 혐의로 일본에 재차 망명해야만 하였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3차 [[갑오개혁]]====
 
====3차 [[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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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의의와 평가===
 
===[[갑오개혁]]의의와 평가===
 
약 19개월 동안 지속되어온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평가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정치적 개입에 의한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한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율적 개혁으로 보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볼 때, [[갑오개혁]]은 멀리 [[실학|실학(實學)]]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개혁요구 내지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반청·독립정신을 가진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나 청말(淸末)의 [[무술변법|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시의성(時宜性)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반일·반침략을 우선시켰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약 19개월 동안 지속되어온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평가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정치적 개입에 의한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한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율적 개혁으로 보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볼 때, [[갑오개혁]]은 멀리 [[실학|실학(實學)]]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개혁요구 내지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반청·독립정신을 가진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나 청말(淸末)의 [[무술변법|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시의성(時宜性)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반일·반침략을 우선시켰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ref>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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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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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A는 B와 관련이 있다||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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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A는 B와 관련이 있다||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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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갑오개혁]]||A는 B와 관련이 있다||1894-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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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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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갑오개혁의 정치사적 의의와 현재적 시사점」, 『아시아리뷰』 Vol 17,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15, 91-132쪽.  
**김현철, 「갑오개혁의 정치사적 의의와 현재적 시사점」, 『아시아리뷰』, Vol 17, 2015, 91-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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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삼,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운동의 조세제도개혁 관련성에 관한 연구」, 『조세연구』 Vol 17,  한국조세연구포럼, 2017, 87-121쪽.  
**최학삼,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운동의 조세제도개혁 관련성에 관한 연구」, 『조세연구』, Vol 17, 2017, 87-121쪽.  
 
 
 
===유용한 정보===
 
 
*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영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0925 갑오개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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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5:43 기준 최신판

갑오개혁(甲午改革)
유영익, "갑오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갑오개혁
한자표기 甲午改革
이칭 갑오경장(갑오경장(甲午更張))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894년-1896년
관련인물 고종
관련단체 군국기무처



정의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근대적 개혁운동을 가리킨다.

내용

역사적 배경

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등 21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1]

갑오개혁의 내용

  • 제1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 주도하에 1894년 7월 27일부터 1894년 12월 17일까지 추진되었다. 군국기무처의 핵심인물들은 청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서양 및 일본의 문물을 모델로 하는 개화세력으로 반봉건적인 혁신적 개혁을 단행하였다.[2]
  • 제2차개혁 또한 조선의 내각대신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개혁이었다. 특히, 내부대신 박영효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며 과감하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시행된 개혁안은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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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지식 관계망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에 관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청일전쟁 갑오개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을미사변 갑오개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명성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흥선대원군 이하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조선 고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미우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이노우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김홍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오개혁 박영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유영익, "갑오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유영익, "갑오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유영익, "갑오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유영익, "갑오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김현철, 「갑오개혁의 정치사적 의의와 현재적 시사점」, 『아시아리뷰』 Vol 17,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15, 91-132쪽.
  • 최학삼, 「갑오개혁과 동학농민운동의 조세제도개혁 관련성에 관한 연구」, 『조세연구』 Vol 17, 한국조세연구포럼, 2017, 87-121쪽.
  • 유영익, "갑오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