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낙선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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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선재는 1847년에 중건된 사대부 주택형식의 건축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에 위치한 조선시대 궁궐인 [[창덕궁]]에 속한 건축물의 하나로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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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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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건물과의 관계=== | ===주변 건물과의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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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덕궁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은 사대부가 주택 형식의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이다. 되어 있다. 서쪽 끝 한 칸은 앞으로 돌출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전퇴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누마루 아래에서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에는 빙렬(氷裂)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이는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도 지닌다. 이 밖에 각종 창호의 무늬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이 있다.<ref>김왕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381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인데 일제강점기 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 + | ===낙선재의 부속 건물들=== |
− | === | + | [[창덕궁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인데 일제강점기 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ref>김왕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381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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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의 및 평가=== | ||
+ | [[창덕궁 낙선재]]는 사대부가 주택 형식에 궁궐침전형식 일부 응용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으로 특히 주목된다.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 또한 높은 건물이다.<ref>김왕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381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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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주석== | ||
<references/>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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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 ===인용 및 참조=== | ||
*저서 | *저서 | ||
− | ** 문화재청, 『창덕궁, 조선의 시간을 거닐다』,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10 | + | ** 문화재청, 『창덕궁, 조선의 시간을 거닐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10. |
− |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일본 궁내청 소장)창덕궁 사진첩』,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6. | + |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일본 궁내청 소장)창덕궁 사진첩』,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6. |
− | **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 1405-2005』,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5. | + | **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 1405-2005』,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5. |
− |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세계의 궁궐과 창덕궁』,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5. | + |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세계의 궁궐과 창덕궁』,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5. |
− | * | + | ===더 읽을 거리=== |
− | * | + | *웹자원 |
+ |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7640000,11&flag=Y 창덕궁 낙선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청』<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 | ||
+ | **"[http://www.k-heritage.tv/www/jsp/heritage/search/search.jsp?searchText=%EB%82%99%EC%84%A0%EC%9E%AC 창덕궁 낙선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채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재재단.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한글고문서]] | ||
− | [[분류: | + | [[분류:문화유산]] |
2017년 11월 24일 (금) 23:21 기준 최신판
창덕궁 낙선재 (昌德宮 樂善齋) |
|
대표명칭 | 창덕궁 낙선재 |
---|---|
한자표기 | 昌德宮 樂善齋 |
유형 | 유적, 궁궐 |
시대 | 조선/1847년 |
지정번호 | 보물 제1764호 |
지정일 | 2012년 03월 02일 |
관련유물유적 | 창덕궁, 동의보감내경편언해, 문장풍류삼대록, 태원지, 청백운, 징세비태록, 형세언, 홍루몽, 무목왕정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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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록에 위치한 창덕궁에 속한 건물이다.[1]
내용
창덕궁 낙선재의 위치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의 오른편에 자리하였으며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는데, 낙선재에는 이들 건물도 포함된다. 이들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계(花階)와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낙선재는 원래 창경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다. [2]
주변 건물과의 관계
처음에는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낙선재를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756년 화재 이후 1847년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운 세워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고종대에 들어와서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영친왕비 이방자가 기거하였다.[3]
건축물로서의 낙선재의 특징
창덕궁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은 사대부가 주택 형식의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이다. 되어 있다. 서쪽 끝 한 칸은 앞으로 돌출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전퇴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누마루 아래에서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에는 빙렬(氷裂)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이는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도 지닌다. 이 밖에 각종 창호의 무늬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이 있다.[4]
낙선재의 부속 건물들
창덕궁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상량정의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인데 일제강점기 동안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상량정의 뒤에는 긴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서고가 있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5]
의의 및 평가
창덕궁 낙선재는 사대부가 주택 형식에 궁궐침전형식 일부 응용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의 장식으로 특히 주목된다. 조선 후기 건축 장인(匠人)들의 축적된 기량을 엿볼 수 있어 건축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조선왕가의 실제 침전으로 사용된 역사성 또한 높은 건물이다.[6]
연계 자원 보러 가기 |
• 낙선재와 한글소설 |
지식 관계망
- 낙선재와 한글소설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창덕궁 낙선재 | 동의보감내경편언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문장풍류삼대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태원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청백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징세비태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형세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홍루몽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창덕궁 낙선재 | 무목왕정충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주석
- ↑ 김왕직,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왕직,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저서
- 문화재청, 『창덕궁, 조선의 시간을 거닐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10.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일본 궁내청 소장)창덕궁 사진첩』,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6.
-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육백년 : 1405-2005』,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5.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세계의 궁궐과 창덕궁』,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