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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조선 말기에 널리 쓰였던 화폐로 개항 이후 급증하는 재정 수요와 당면한 재정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2년부터 1904년까지 주조·유통시켰다. [[전환국]](典圜局)에서 만들었는데 2전5푼(二錢五分)의 액면으로, 표면 상단에는 오얏꽃무늬〔李花章〕, 우측에는 오얏나뭇가지〔李枝〕, 좌측에는 무궁화 무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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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부터 1904년까지 주조·유통된 화폐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947&cid=46623&categoryId=46623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 [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sup>online</sup></online></html>.</ref>
 
  
 
=='''내용'''==
 
=='''내용'''==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에 의한 은본위제 시행과 1901년의 [[화폐조례]](貨幣條例)」에 의한 [[금본위제]](金本位制) 채택에 의해 보조 화폐로 계속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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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화의 탄생과 유통===
1892년부터 1904년까지 발행한 총 화폐 1,890여 만 환 중 백동화는 1,670여 만 환으로, 발행 총액의 약 88%를 차지했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 [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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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에 개항 이후 급증하는 재정 수요와 당면한 재정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동화]]를 주조하였다. 1892년부터 1904년까지 발행한 총 화폐 1,890여 만 환 중 백동화는 1,670여 만 환으로, 발행 총액의 약 88%를 차지했다.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에 의한 은본위제 시행과 1901년의 [[화폐조혜|「화폐조례(貨幣條例)」]]에 의한 [[금본위제|금본위제(金本位制)]] 채택에 의해 보조 화폐로 계속 사용되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947&cid=46623&categoryId=46623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그런데 당시 시중에 유통된 백동화에는 전환국에서 주조한 것 이외에도 민간이나 외국인에 의한 위조(僞造), 또는 외국에서 밀수입된 것도 상당액 포함되어 있었다. 백동화의 위조 행위는 크게 특주(特鑄)·[[묵주]](默鑄)·사주(私鑄)로 구분되었다. 특주는 왕이 직접 대신이나 일부 관리를 통해 특정인에게 이의 주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규모가 가장 컸다. [[묵주]]란 전환국에서 극인(極印)을 훔쳐 위조하는 것으로,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묵인케 하는 방법을 썼다. 사주는 순전한 위조 행위로서 몰래 숨어 주조한 뒤 유통시켰다. 위조 행위에는 우리나라 사람 이외에도 일본·청·영국·독일 사람들까지 가담했고, 위조된 금액은 1905년 1000여 만 환에 달해 서울의 위조화폐 유통액은 진짜 돈의 20∼30%, 평양은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남주(濫鑄)와 위조, 외국으로부터의 밀수입은 국내 통화량을 더욱 증가시켜 화폐 가치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더욱이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만 유통되어 가치 폭락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국내 화폐를 가진 자는 그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상품이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외국 화폐와 교환하려 했다. [[궁내부]](宮內府)에서는 일본 화폐를 대량 매입했으며, [[탁지부]](度支部)에서는 세금까지도 일본 화폐로만 받으려고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 [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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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화의 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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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중에 유통된 백동화에는 민간이나 외국인에 의한 위조(僞造), 또는 외국에서 밀수입된 것도 상당액 포함되어 있었다. 백동화의 위조 행위는 크게 [[특주|특주(特鑄)]]·[[묵주|묵주(默鑄)]]·[[사주|사주(私鑄)]]로 구분되었다. <br/>[[특주]]는 왕이 직접 대신이나 일부 관리를 통해 특정인에게 이의 주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규모가 가장 컸다. <br/>[[묵주]]란 전환국에서 극인(極印)을 훔쳐 위조하는 것으로,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묵인케 하는 방법을 썼다. <br/>[[사주]]는 순전한 위조 행위로서 몰래 숨어 주조한 뒤 유통시킨 것이다.
  
일본 화폐 100엔과의 교환비는 1899년 116환, 1900년 127환, 1901년 140환, 1902년 178환, 1903년 188환, 1904년 198환, 1905년 211환이었다. 이처럼 백동화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민중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화폐제도를 개혁하자는 요구가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실 재정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일시적이나마 재정 수입에 도움이 되는 한 전면적인 검토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04년 전환국의 폐지로 이의 주조도 금지되었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 [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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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화]] 가치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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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남주(濫鑄)]]와 위조, 외국으로부터의 밀수입은 국내 통화량을 더욱 증가시켜 화폐 가치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더욱이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만 유통되어 가치 폭락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국내 화폐를 가진 자는 그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상품이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외국 화폐와 교환하려 했다. [[궁내부|궁내부(宮內府)]]에서는 일본 화폐를 대량 매입했으며, [[탁지부|탁지부(度支部)]]에서는 세금까지도 일본 화폐로만 받으려고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947&cid=46623&categoryId=46623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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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화]]의 가치 하락과 주조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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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폐 100엔과의 교환비는 1899년 116환, 1900년 127환, 1901년 140환, 1902년 178환, 1903년 188환, 1904년 198환, 1905년 211환이었다. 이처럼 백동화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민중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화폐제도를 개혁하자는 요구가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실 재정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일시적이나마 재정 수입에 도움이 되는 한 전면적인 검토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04년 전환국의 폐지로 [[백동화]]주조가 전면 금지되었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046  백동화(白銅貨)]",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6947&cid=46623&categoryId=46623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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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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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仁川府廳 編, 『仁川府史』, 京城: 仁川府, 昭和 8년(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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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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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 고종실록(高宗實錄)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황성신문(皇城新聞)
 
 
*단행본
 
*# 申賀宣政, 이석륜 역,「근대한국화폐(近代韓國貨幣) 및 전환국의(典圜局) 연혁(沿革)」, 『한국경제사문헌자료』 6, 1975)
 
*# 인천부청, 仁川府史 / 仁川府廳 編., 京城 : 仁川府, 昭和8년[1933]
 
 
 
*논문
 
*논문
*# 이건재, 「光武年間 白銅貨 인플레이션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석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사전공 1992
+
** 이건재, 「光武年間 白銅貨 인플레이션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사전공 석사학위논문, 1992.
*# 원유한, 「전환국고(典圜局考)」,『역사학보(歷史學報)』 37, 1968
+
** 이석륜 역,「근대한국화폐(近代韓國貨幣) 및 전환국의(典圜局) 연혁(沿革)」, 『한국경제사문헌자료』6, 경희대학교 한국경제경영사연구소, 1975, 29-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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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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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실록(高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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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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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신문(皇城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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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유한, 「전환국고(典圜局考)」, 『역사학보(歷史學報)』 37,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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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4:01 기준 최신판

백동화(白銅貨)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대표명칭 백동화
한자표기 白銅貨
시대 1892년-1904년
용도 경제제도, 화폐
관련단체 전환국(典圜局)
관련유물유적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정의

1892년부터 1904년까지 주조·유통된 화폐이다.[1]

내용

백동화의 탄생과 유통

한말에 개항 이후 급증하는 재정 수요와 당면한 재정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동화를 주조하였다. 1892년부터 1904년까지 발행한 총 화폐 1,890여 만 환 중 백동화는 1,670여 만 환으로, 발행 총액의 약 88%를 차지했다.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에 의한 은본위제 시행과 1901년의 「화폐조례(貨幣條例)」에 의한 금본위제(金本位制) 채택에 의해 보조 화폐로 계속 사용되었다.[2]

백동화의 위조

당시 시중에 유통된 백동화에는 민간이나 외국인에 의한 위조(僞造), 또는 외국에서 밀수입된 것도 상당액 포함되어 있었다. 백동화의 위조 행위는 크게 특주(特鑄)·묵주(默鑄)·사주(私鑄)로 구분되었다.
특주는 왕이 직접 대신이나 일부 관리를 통해 특정인에게 이의 주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규모가 가장 컸다.
묵주란 전환국에서 극인(極印)을 훔쳐 위조하는 것으로, 당국자에게 뇌물을 주고 묵인케 하는 방법을 썼다.
사주는 순전한 위조 행위로서 몰래 숨어 주조한 뒤 유통시킨 것이다.

백동화 가치변동

남주(濫鑄)와 위조, 외국으로부터의 밀수입은 국내 통화량을 더욱 증가시켜 화폐 가치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더욱이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만 유통되어 가치 폭락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국내 화폐를 가진 자는 그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상품이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외국 화폐와 교환하려 했다. 궁내부(宮內府)에서는 일본 화폐를 대량 매입했으며, 탁지부(度支部)에서는 세금까지도 일본 화폐로만 받으려고 하였다.[3]

백동화의 가치 하락과 주조 금지

일본 화폐 100엔과의 교환비는 1899년 116환, 1900년 127환, 1901년 140환, 1902년 178환, 1903년 188환, 1904년 198환, 1905년 211환이었다. 이처럼 백동화의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서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민중의 생활이 어렵게 되자 화폐제도를 개혁하자는 요구가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실 재정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일시적이나마 재정 수입에 도움이 되는 한 전면적인 검토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04년 전환국의 폐지로 백동화주조가 전면 금지되었다. [4]

지식 관계망

  •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백동화 전환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동화 은본위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동화 금본위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동화 백동화 무효에 관한 고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백동화 탁지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백동화(白銅貨)",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백동화(白銅貨)",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백동화(白銅貨)",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백동화(白銅貨)",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백동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건재, 「光武年間 白銅貨 인플레이션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사전공 석사학위논문, 1992.
    • 이석륜 역,「근대한국화폐(近代韓國貨幣) 및 전환국의(典圜局) 연혁(沿革)」, 『한국경제사문헌자료』6, 경희대학교 한국경제경영사연구소, 1975, 29-54쪽.